전세계를 경악시킨 역사의 현장,
놀랍도록 치밀한 상상력으로 추악한 진실을 파헤친 돈 드릴로의 역작
『리브라』는 현대사회의 문화적 경험과 사회적 현실을 깊이있게 통찰하는 작품들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돈 드릴로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JFK 암살범으로 알려진 리 하비 오즈월드의 행적을 중심으로 1960년대 미국 사회 안팎의 세력과 인물들을 재구성한 걸작이다. 극적인 속도감과 탄탄하면서도 세밀한 구성으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여러 세력들이 얽혀 이뤄낸 세계사적 충격의 한 장을 모자이크화처럼 되살려냄으로써,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실 그 너머의 ‘진짜 진실’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솜씨는 가히 거장의 면모를 보여준다. 마피아, 반(反)까스뜨로 세력, CIA와 구 소련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세력이 얽히고설킨 가운데, 순탄치 못했던 어린시절을 거쳐 불안정한 인물로 성장한 인간 오즈월드의 심리적 궤적을 추적하고 그가 대통령을 암살한 동기와 과정을 생동감있게 풀어냄으로써 돈 드릴로는 사실과 허구를 능수능란하게 교차시켜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JFK 암살사건은 지금까지 수차례에 걸쳐 영화화, 소설화될 정도로 미국인뿐 아니라 세계인의 마음속에 역사적 진실의 실체에 대한 의혹과 음모의 가능성을 뿌리깊이 심어준 중요한 계기였다. 토머스 핀천과 함께 포스트모던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드릴로는 치밀한 상상력으로 이 역사의 현장을 또 하나의 소설적 진실로 복원해냈다.
『리브라』는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용의자로 체포되어 총살된 리 하비 오즈월드의 성장과정부터 그가 암살을 하게 되기까지의 행적을 좇는 가운데, 그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여러 인물과 세력의 이야기가 얽히면서 다양하고 복잡한 그림을 완성하는 구조이다. 오즈월드의 행적을 중심으로 주된 줄거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채 홀어머니 마거리트와 함께 뉴욕의 브롱크스에서 살아가는 리 하비 오즈월드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감호소에서 상담치료를 받는 등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다. 뉴올리언즈로 이사한 오즈월드는 학교를 그만둔 뒤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자본론』이나 맑스주의 책들을 읽고, 뜨로쯔끼를 동경하고 사회주의 비밀조직에 들어가기를 열망한다. 미 해병대에 입대해 일본의 아쯔기(厚木)에 파병된 오즈월드는 총기사건으로 군 영창에 수감되어서도 맑스주의와 뜨로쯔끼에 대한 책을 탐닉한다. 소련으로 건너간 오즈월드는 모스끄바의 호텔방에서 자살을 기도하고 소련 보건부의 정신병동에서 치료를 받은 뒤 미 대사관을 찾아가 자신은 맑스주의자로서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겠노라며 여권을 반납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의 CIA와 FBI 그리고 소련 KGB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된 오즈월드는 소련 당국으로부터 오스왈도비치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소련 국가보안위원회 요원들에게 자신의 군체험을 털어놓으며 U-2기와 미 해군에 대한 정보를 준다. 민스끄로 보내진 오즈월드는 팔에 자신과 똑같은 상처를 갖고 있는 마리나라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고 첫딸을 낳지만 끝내 소련에 정착하지 못한 채 미국 포트워스로 돌아온다. 마리나는 하루가 다르게 미국생활에 적응하지만 오즈월드는 FBI 요원들의 조사를 받고 계속 감시를 받는 신세가 된다. CIA 요원 죠지 드 모렌실트의 주선으로 댈러스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오즈월드는 자신의 경험담을 기록하기 위해 타이핑을 배우고 라이플총을 구입하며, 뉴올리언즈로 돌아가서는 꾸바의 민간단체와 사회주의공산당 등과 연락을 주고받는다. 케네디 정부의 대(對)사회주의권, 특히 꾸바 정책에 반감을 품은 데이비드 페리 등의 은퇴한 미 정보국 요원과 접촉하고, 페리와 티제이 매키의 지휘 아래 총술을 연마하던 오즈월드는 미국 정부와 CIA 등이 꾸바의 피델 까스뜨로 암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댈러스에서 워커 장군을 암살한 뒤 꾸바로 망명할 계획을 꾸민다. 한편 데이비드 페리 일당은 댈러스에서 오즈월드를 앞세워 대통령 암살을 기도하고, 오즈월드는 아내에게 댈러스 시내로 와서 살자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한다.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를 방문한 존 F. 케네디 대통령 부부가 차량 행진을 하는 때를 틈타 오즈월드는 자신이 근무하던 창고 6층에서 그들을 향해 총을 발사해 대통령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급히 도망치던 오즈월드는 자신을 쫓던 경찰관까지 쏘아 현장에서 체포되고, 대통령 암살 용의자로 수사를 받는 도중 유대인이자 마피아와 연루된 것으로 추측되는 잭 루비가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인간 오즈월드는 생활고에 찌들어 가정사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편모의 가정, 걸핏하면 오즈월드를 상담치료에 내모는 학교, 그를 따돌리고 괴롭히기만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어둡고 고립된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스스로를 역사의 대리인으로 생각하게 되고 불안정한 인물로 성장한다. 어른이 된 그는 “모든 면에서 균형이 잡혀 분별있고 현명한” 미덕을 갖춘 별자리인 ‘리브라’(천칭자리) 태생임에도 “다소 불안하고 충동적”이며 “쉽게, 너무나 쉽게 외부의 영향을 받는데다가 언제든 위험한 도약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부정적 성향의 인물로 비친다. 그러나 단순한 정신병자나 충동에 의해서 행동하는 미치광이라는 암살사건 수사 초기의 발표와 달리, 드릴로가 조사하고 소설 속에 그려낸 바대로 오즈월드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비판정신으로 무장한, 지적이고 냉철한 반체제주의자였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상상의 완벽한 결합
『리브라』는 여러 가닥의 플롯이 얽히고설키며, 줄거리와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다양한 내용이 삽입되고 존재 의미가 불확실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 등 전형적인 삽화식 구성을 취한다. 전통적인 서사구조의 틀을 벗어나 시공간 배경이 자주 바뀌고 시점도 여러번 변하면서 서술되어 단선적인 줄거리만 좇아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같은 사건을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시선에 따라 다르게 보여주기도 하고, 앞에서 나온 내용을 되풀이 서술하는 가운데 묘하게 변주하기도 한다. 얼핏 보면 줄거리와 무관한 듯한 단어와 문장 들이 끼어들면서 모자이크조각처럼 큰 그림을 맞춰가는 흐름은 읽는이에게 혼돈과 무질서, 혹은 미로 같은 어지러운 공간을 헤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케네디 암살 이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시종일관 내재되어 있던 진실이 사라져버린, 모호한 혼돈의 세계에 굴러떨어진 느낌이었다. 역사가 은밀하게 변조되었다는 의식이 미국인들 마음속에 싹트고 있다”(『뉴스위크』 1988년 8월 29일)는 돈 드릴로의 발언이 시사하는바, JFK 암살사건이 지닌 모호하고 복합적인 상황을 표현하고자 한 의도적 구성이라 볼 수 있다. 매카시즘의 광풍과 냉전체제를 겪으면서 기존 미국의 대(對)사회주의 정책에 편승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며 애국주의로 무장한 미국의 구정보요원들, 세계적으로 사회주의세력을 확장하려 기도하던 소련의 노력, 사회주의 꾸바를 옹호하는 세력과 이를 전복하려는 세력 간의 알력과 갈등, 폭력과 검은 돈의 온상인 마피아의 개입 등이 모자이크조각들처럼 조금씩조금씩 더해져 결국 이 엄청난 사건의 전모를 구성하게 된다. 작가는 그 하나하나는 서로 무관한 듯 보이는 요소들이 멀리서 가까이서 모여들어 만들어내는 그림이 한 사회와 한 시대의 모습이라는 점을 놀랍도록 치밀한 상상력으로 조합해 보여준다. 이 세기의 사건의 주역인 오즈월드는 예외적 개인처럼 보이지만, 거대한 그림 안에서 그 역시 모자이크의 한 조각일 뿐이며, 60년대 미국 사회의 분위기가 잉태할 수밖에 없던 인물인 것이다. 돈 드릴로는 미궁에 빠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 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발생시킨 세계의 진면목을 상상력으로 복원해낸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JFK 암살사건은 이듬해인 1964년 워런 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따라 오즈월드의 단독범행으로 잠정 결론이 내려졌으나 35년이 지난 지금도 명확한 원인과 배후의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이 사건의 전말이 채 밝혀지기도 전에 서둘러 그 존재가 지워지고 잊혀진 용의자 리 하비 오즈월드. 그는 불우했던 어린시절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