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멜로’의 배우
김진규
한국영상자료원 선정 ‘한국영화 100선’에
가장 많이 오른 배우, 김.진.규.
아내 김보애가 털어놓는
배우 김진규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
◎ ‘스크린의 신사’-부드럽고 어진 이미지의 배우
김진규는 타고난 미남이기도 했지만, 분위기로 모든 말을 하는 배우였다.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한없이 선량하고 신중하고 믿음직해서 지극히 중독성이 강했다. 당시 남성에게 의지하고 보호받기를 원하는 여성 팬들에게는 가히 최고의 남성상이었다.
배우 김진규(金振奎, 1923~1999)는 1955년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에서 지적인 빨치산 역으로 데뷔한 이후, <아빠 안녕> <이 생명 다하도록> <새 엄마> 등에 출연하여 흥행을 성공시켰다. 1960년대에는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과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보여준 탁월한 연기력으로 대중적 지명도를 얻으면서 스타로서 화려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다른 한편으로는 김기덕 감독의 <하녀>를 비롯하여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 <카인의 후예> 같은 문예영화에서 특유의 내면 연기를 선보였다. ‘스크린의 신사’로 통하던 그는 시종일관 부드럽고 어진 남성 역할을 도맡아 하면서 중년층 여성에게 인기를 끌었다. 나중에는 <종자돈>의 연출까지 영역을 넓혔다가, 직접 제작하고 주연을 맡은 <성웅 이순신>과 <난중일기>이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서 파산하게 된다. 이 일로 인해 두 번째 부인인 김보애와 헤어지는 불행을 겪는다.
전후 복구 과정에서 생긴 스타 시스템 1세대의 주역으로 7백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이민, 최무룡, 신영균과 경쟁했으며, 최은희, 김지미, 조미령 같은 여배우의 상대였다. 다음 세대인 신성일과 엄앵란의 선배 연기자였고, 문희, 윤정희, 남정임 트로이카에게는 아버지뻘 연기자이면서도 여전히 상대 남자배우였다. 감독 김기영, 신상옥, 유현목은 그보다 한두 살 어렸으며, 그들의 대표작에는 그가 어김없이 ‘출현’했다.
◎ 구체적인 자료와 인터뷰를 통한 탐사와 검증
1) 그동안 불확실하고 미진하게 알려져 왔던 김진규의 생몰연대와 출연작, 학력과 경력, 사망 원인 등을 자료의 검증을 통해 바로잡았다. 배우 김진규의 명실상부한 전기(傳記)가 되게 실증적 자료를 갖추었다.
2) 당시 함께 활동한 배우들의 증언과 인터뷰: 저자는 당시 김진규가 함께 작업한 감독들과 동료 배우들 그리고 후배들을 찾아가 육성 증언과 인터뷰를 채록했다. 유현목, 임원식, 편거영 감독, 배우 최은희와 윤인자, 양성우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 작가 황석영 등이 들려주는 배우 김진규에 대한 증언과 회고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3) 영화계 데뷔 이전 시기의 행적: 일본에 양자로 들어갔던 시절, 악극단에서 처음 무대를 익히던 시절, 영화계 데뷔 이전 10년 동안의 이야기 등이 새롭게 밝혀진다.
4) 그의 첫 번째 부인 이민자에 대한 새로운 조명: 당시 ‘한국의 에바 가드너’ 또는 ‘미망인 전문 배우’로 불리던 여배우 이민자를 새롭게 조명한다. 김진규와 이민자가 헤어지게 된 배경, 6?25 전쟁 때 두 사람이 겪은 고통과 가난 등.
-“원효로 근방에서 다 쓰러져가는 집의 처마 밑 방 한 칸을 겨우 얻었는데, 비가 오면 방이 물바다가 되었다. 부엌도 따로 없어서 밖에 풍로를 놓고 밥을 지어야 했다. 그러다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설익은 밥을 들고 들어와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오죽하면 그 도도하고 자존심이 강한 이민자가 친구들에게 이렇게 넋두리를 했을까. “난 이 지긋지긋한 가난만 면할 수 있다면 몸이라도 팔겠어. 나도 이젠 지쳤어. 가난이 너무 싫어.””
5) 김진규의 말년과 병상 기록: 1980년대 중반부터 그는 배우로서의 활동을 접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표 배우라는 자부심과 평생 주연만을 맡으며 스타로 떠받들어져 온 자존심 때문에 노년이 되어서는 조연을 맡기를 거부하며 영화판의 현장을 떠났다. 제주도에 내려가 호텔 사업을 시작한 사연, 골수암으로 투병하던 마지막 순간들이 가족들의 육성을 통해 처음으로 소개된다.
◎ 한국영화계의 살아 있는 역사가 풍경처럼 펼쳐진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배우들과 출연작들이 소개되고 그때의 일화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에 녹아들면서, 1960~1970년대 한국영화계의 풍경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김진규가 광복 이후 한국영화계에서 스타 시스템의 1세대로 떠오른 배우인 만큼, 당대의 라이벌들인 이민, 김승호, 최무룡, 신영균과 얽힌 이야기, 신성일과 엄앵란 같은 후배 배우들, 문희, 윤정희, 남정임 여배우 트로이카와 함께 작업한 사연이 나온다.
1) 겹치기 출연-‘일명 가께모찌’ 이야기
정당한 출연료(개런티)를 보장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시 배우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흥행업자가 주는 대본들을 일단 주는 대로 받아둘 수밖에 없었다.
김진규라는 배우 한 명이 1960년 한 해 동안 출연한 영화는 무려 22편!
-“그 시절에는 흥행업자가 전해주는 대본은 일단 무조건 받아두는 것이 상식이었다. 일은 많을수록 좋다는 통념에서였다. 대본의 내용을 꼼꼼히 챙겨볼 겨를이 없었다. 촬영장을 오가는 차량 안에서 대본을 읽거나 심지어는 집에 들어와 화장실에 앉아서야 겨우 표지를 들춰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거실에도 대본이 있고 안방에도 대본이 펼쳐져 있고, 2층 거실과 베란다에까지 대본이 흩어져 있었다.
김진규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대본 사이를 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뛰어다녔다. 촬영지 이동에 소요되는 시간을 가늠하면서 다음 스케줄에 맞추기 위해 늘 시간에 쫓겨야 했다. 그것은 초특급 배우인 그의 개런티가 그리 많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그 당시 B급이나 C급 배우들은 거의 개런티 없이 출연했다. 그저 차비에다가 식사만 해결해주면 아낌없이 몸을 던지던 시절이었다.”
2)후시녹음(後時錄音)-일명 ‘입맞추기’
동시녹음기가 없던 시절, 유명 배우 별로 전담하는 성우들이 따로 있어서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해야 했다.
-“그때는 (배우가) 대충 입을 벌려 대사를 외고 나면, 편집 과정에서 성우가 배우들의 입모양을 따라 대사를 입혔다. 그것을 ‘입맞추기’라고 했다. 배우가 대본을 따라 대사를 외우는 게 아니라 주연 배우의 입모양을 보고 성우가 대사를 창조하는 방식이다.”
-“(성우 중에서) 고은정 씨는 문희, 남정임, 윤정희의 목소리를 도맡았고, 특히 생동감 있고 섹시한 엄앵란의 목소리 역시 그녀가 전담했다. 김진규의 목소리는 성우 박영민 씨가 전담했다. 중후하고 안정된 박영민 씨의 목소리가 그의 목소리와 많이 닮았던 것이다.
촬영 현장에서는 영화배우들의 연기가 불을 뿜었지만, 녹음 스튜디오에서는 성우들이 화면을 보며 주인공보다 더 뜨거운 목소리로 경연장을 만들었다. 화면의 주인공보다 더 슬프게, 현장의 장면보다 더 뜨겁게 장면 장면을 엮어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훌륭한 협업 체제였고 공동의 예술 작업이었다.”
3) 매니지먼트가 없던 시절의 연예계 풍경과 배후의 권력
요즘처럼 영화대본이 나오면 섭외할 배우들에게 보내고, 배우는 기획사와 소속 에이전시 회사와 협의하여 일정을 정하는 식이 아니었다. 당시 스타들의 열악한 상황이 적나라하게 밝혀진다!
-“소속사와 매니저 같은 연예인 관리 체계나 보호 장치가 없었다. 배우 혼자 기획하고 혼자 뛰고 혼자 결산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배우들은 인기가 있든 없든, 연기력이 출중하든 시원찮든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야말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식으로 규모가 없고 장래를 기약할 수 없는 직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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