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사이’에서 뉘앙스와 디테일로만 발현되는 ‘회색의 진실들’.
이 책의 저자 시리 허스트베트는 인문학자이고 소설가이며 예술비평가이다. 소설 《불타는 세계》와 《내가 사랑했던 것》으로 평단으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은 그녀는 현재까지 6편의 소설과 3권의 에세이집, 논픽션 1권을 출간했고, 2012년에 국제 가바론 인문학 상을 수상했다. 국내에는 그중 4편의 소설과 3권의 에세이집이 번역 출간되었다.
미국 미네소타주의 노르웨이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나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찰즈 디킨스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허스트베트는 시인으로 등단한 후 소설가로 전향하여 발표한 작품들로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문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노르웨이 문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하던 중 경련이 일어나면서 마치 자아가 정신과 육체로 분열되는 듯한 경험을 한 후, 그녀는 그 트라우마적 경험을 기점으로 신경과학과 심리학에 심취하게 된다. 지금까지 발표한 여러 권의 소설과 에세이에서 허스트베트는 예술, 페미니즘, 신경과학, 심리학, 철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끌어온 통찰력을 바탕으로 개인과 사회에 내재해있는 통념과 문화적 진부성을 거듭 전복한다.
이 책은 시리 허스트베트가 그동안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11개의 에세이를 모은 것인데, 각각의 에세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논점을 제공할 만큼 분명하고 잘 탐구되어 있다. 저자는 예술, 성 그리고 마음을 바라보는 시선을 분석하고, 자신의 체험을 공유하며, 인문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통찰을 바탕으로 흥미로운 견해를 피력한다. 허스트베트는 이 책을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유감스런 간극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는 여행’으로 봐달라고 독자들에게 청한다.
특히 시각예술, 문학, 철학, 신경과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그녀는 도전적인 주제에 관한 여러 글을 통해 자연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분리에 다리를 놓으려 시도하고 다양한 사례와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성, 예술의 의미, 정신 자체를 페미니즘과 심리학의 렌즈를 통해 탐구한다.
여기서 시리 허스트베트가 예술과 성, 마음에 주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술과 성性, 그리고 마음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물리적 현실을 지배하며 우리의 일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예술은 우리가 타인과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 하나의 상징체계로서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고, 성과 마음은 정치와 사회문화, 도덕, 관습, 가치, 그리고 우리의 행위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 정체성의 본질을 탐구하는 주요한 지표이자 그 자체로 인간 정체성의 발현이기도 하다. 시리 허스트베트가 주의를 기울이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예술, 성, 마음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세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대개 전통적이고 학습된 시선에 기댄다. 성과 젠더의 구분은 세상을 반으로 가르고 우리 사이에 경계를 새겨, 우리가 서로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훨씬 많다고 느껴지게 함으로써 차별이라는 억압적 상황을 구축한다. 이것은 서양 철학의 오래된 전통인 이원론적 세계관, 물질과 정신, 육체와 마음, 내용과 형식, 이성과 감정,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항대립의 틀로 꾸준히 학습해온 결과라는 것이다.
인간 정체성을 탐구하는 지도의 주요한 지표가 왜곡되고 오염된 것이라면 어떠할 것인가. 우리가 학습을 통해 거의 무의식적으로 구축한 이 이원론적 세계관이 사실은 거짓 서사라면 어떠할 것인가?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보는 한 여자’는 예술?성?마음을 바라보는 기존의 이원론적 시선이 몹시 불합리하며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기존의 이항대립의 틀로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서사를 발견해낸다.
총 11개의 에세이 중 첫 번째 에세이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보는 한 여자>는 책의 제목이 될 뿐 아니라 책 전체의 논조를 잡고, 작가가 관심을 갖고 있는 질문들과 그녀가 제시하는 몇 가지 답에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저자는 피카소와 베크만과 데 쿠닝의 작품들을 보며, 작품에 드러난 또는 화가 자신에 내재해있는 여성관과 그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서술방식이 여성성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를 살펴본다.
피카소의 삶과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인들은 페르낭드, 올가, 마리 테레즈, 도라… 처럼, 언제나 성姓이 아닌 이름으로만 불린다는 것에 주목하고, 미학적이고 장식적이고 피상적인 것을 여성적이라고 비판한 베크만과 여성을 지나치게 혐오스럽게 표현한 데 쿠닝의 작품들이 불러일으킨 논란들을 예리하게 바라보며, 예술을 서사적·남성적 경쟁구도의 역사로 바꾸는 모든 서사에 반대함을 밝힌다.
<풍선의 마술>에서는 5840만 달러에 팔린 제프 쿤스의 조각 <풍선 개>를 예로 들며, 유명한 화가의 이름이 붙으면 그림이 훨씬 더 좋아 보이는 시각예술의 작품 가치에 대해, 남성의 창작물이 여성의 창작물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선호되는 현실에 대해, 그리고 선물시장에서 샀다 팔았다 하는 투자의 대상물처럼 시장에서 광풍을 일으키고 있는 미술상품의 거품에 대해 논하고, 바람을 과하게 불어넣으면 결국 터지고 마는 풍선의 교훈을 상기시킨다.
세 번째 에세이 <나의 루이즈 부르주아>는 오랫동안 무명 예술가로 활동하다 할머니가 되어서야 유명세를 얻게 된, 아흔여덟 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성 중심의 미술계에서 치열하게 일하며 싸워야 했던 위대한 예술가 루이즈 부르주아에게 바치는 사적 찬사이다. 이 에세이가 특히 돋보이는 이유는, 루이즈 부르주아를 ‘나의 루이즈 부르주아’라고 부를 정도로 부르주아의 예술이 감상자?학자?작가로서의 허스트베트에게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불우한 가족사와 성장기의 고통들로 인해 평생 정신분석을 받아야할 만큼 힘든 삶을 살았으나, 예술적 서사의 주도권만큼은 절대 놓지 않고 남성들이 장악한 예술계에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지켜온 루이즈 부르주아. 그녀의 삶과 작품관과 삶의 기준을 되새겨보며, 저자는 그녀가 아흔여덟 살까지 예술가로 버텨준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부르주아의 말을 인용하며, 성공을 거두었다 해도 여성 예술가는 바깥에 있고, 그것은 여전히 여성의 예술이라 불리는 현실을 직시한다.
허스트베트는 문학에서도 많은 탐구거리들을 찾아낸다. 수전 손택이 서른한 살에 한 “고전적 포르노그래피에 대하여”라는 강의를 테이프로 들으며, 오십년 전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당대 젊고 매우 박식했던 손택의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주장, 그리고 그 이후부터 오늘날까지의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살펴본다. 섹슈얼리티와 성차별을 등치하는 잘못된 공식은 오히려 여성 인권에 해를 가하고, 포르노그래피는 여성을 착취한다는 가정은 여성의 욕망을 강탈하는 허위라는 주장에 동의를 표한다.
<글 쓰는 자아와 정신과 환자>는 허스트베트가 4년간 정신병동 환자들에게 글쓰기 지도 자원봉사를 했던 경험을 다룬 무척 흥미로운 글이다. 깊은 통찰이 담긴 이 에세이는 글쓰기의 힘, 정신질환 치료의 뉘앙스와 미스터리를 강렬하고도 매혹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저자는 정신과 의사들이 환자와의 소통을 통해 파악한 정신병의 방대한 메모들이 20세기 중반 항정신성 의약품이 도래하면서 쓸모 적은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그간의 변화와 현대 정신의학분야의 새로운 물결들을 살펴보면서, 그 와중에 치유적 글쓰기가 정신증 환자들의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자신이 6년 동안 받은 정신분석학에 근거한 심리치료를 예로 든 마지막 에세이에서 허스트베트는 방이라는 공간 안에서 오로지 의사와 환자 간에 이루어진 대화를 통해 환자의 내면에 일어나는 움직임을 추적한다. 저자는 이런 분석 작업과 예술 창작을 같은 맥락으로 바라본다. 분석도 창작도 모두 마음속에 있는 기억의 조각들로부터 시작되고, 누군가를 위해 그것을 들려주거나 보여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