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름답고 강렬한 발신의 책이,
착신과 회신으로 다음 이야기들을 탄생시킬 것이다.
_정세랑(소설가)
어째서 이토록 부드럽고 단단한 힘이 있어서,
삶을 조금 더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걸까.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정한 마음이 전하는 안부만으로도
가능해지는 삶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_안미옥(시인)
문장에 담길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
눈부시게 서툴렀던 시절에 바치는 백수린 첫 장편소설
발표하는 작품마다 흔들림 없는 기량을 보여주며 평단과 독자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는 소설가 백수린의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가 출간되었다. 2011년 데뷔한 이래 세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중편소설, 짧은 소설들과 산문을 발표하는 동안 조급해하지 않고 장편의 그릇에 담고 싶은 이야기를 기다린 그가 등단 12년 만에 펴내는 첫 장편소설인 만큼 이 작품의 탄생이 더욱 반갑고 귀하다. 『눈부신 안부』는 2021년 봄부터 2022년 봄까지 계간 『문학동네』에 ‘이토록 아름다운’이라는 제목으로 절찬리에 연재되었다. 작가는 특유의 성실하고 꼼꼼한 소설쓰기로 연재와 개고에 임한 끝에 지극히 완성도 높고 아름다운 첫 장편을 자신의 이력에 추가하게 되었다.
백수린은 첫 소설집 『폴링 인 폴』에서 일찍이 “충실한 기본기”는 물론 “안정적인 보조와 감각으로 자기 세계를 부풀려가는 정통적인 스타일”(문학평론가 서영채)을 보여주었고, 두번째 소설집 『참담한 빛』을 통해 누군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안전한 껍질이 “더 깨진다고 하더라도 세계를 샅샅이 알고 싶다고 마음먹”(소설가 김연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하며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더욱 섬세하게 벼려냈다. 그리고 작가에게 2020 한국일보문학상을 안겨준 세번째 소설집 『여름의 빌라』로 “인생의 불가사의에 대해 가장 우아하게 말하는 법. 그런 걸 찾는다면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시인 박연준)는 평을 받으며 삶의 불가해한 아름다움을 문장 위에서 구현하는 독보적인 감각을 드러내 보였다.
『눈부신 안부』는 백수린이 그간 이루어낸 이러한 성취가 집대성된 작품이다. 비극적 사건을 회피하려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인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던 한 인물이 어른이 된 후 한층 품 넓은 시야로 서툴렀던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좇는다. 차분하게 쌓여가는 서사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진정한 치유와 성장에 도달하려는 한 인간의 미더운 움직임이 백수린의 다정한 문장으로 그려진다.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아름다운 결이 지고, 나를 둘러싼 세계가 확장되는 근사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이 작품은 지금까지의 백수린 소설세계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타국에서 자신이 있을 곳을 홀로 마련해야 했던 한 아이를
다정히 보듬어준 파독간호사 여성들
그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넓어진 시야로 유년을 바라보면서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보려는 진중한 발걸음
『눈부신 안부』의 책장을 펼치면 타인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성실히 거짓말을 해야 했던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 소녀의 이름은 ‘이해미’. 1994년 도시가스 폭발 사고로 친언니를 한순간에 잃고 너무 일찍 인생의 비극성을 깨달아버린 아이다. 엄마와 아빠는 언니를 잃은 고통을 해미에게 감추지 못할 정도로 힘겨워하고, 여동생 ‘해나’는 아직 어려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듯 마냥 해맑아 보인다. 장녀가 된 해미는 선의의 거짓말로 엄마 아빠를 안심시키고 해나의 응석을 받아주며 혼자 슬픔을 삼켜낸다. 아빠와 별거하기로 결정한 엄마를 따라 해나와 함께 독일 G시로 이주하게 되었을 때도 해미는 가족들에게 속마음을 숨길 뿐이다.
살아 있는 게 내가 아니라 언니였다면 언니는 틀림없이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해주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면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좋아요.” 나는 한국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큼이나 낯선 나라로 가는 것이 싫었지만, 엄마 아빠를 위해 그렇게만 말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때로 체념이 필요했다.(30쪽)
G시에서도 해미는 낯선 환경에서 혼자서도 잘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는 무혐의의 거짓말을 이어간다. 그런 해미의 고독과 불안을 가장 먼저 눈치채고 따뜻하게 손 내밀어준 사람은 해미의 친이모 ‘행자 이모’다. 행자 이모는 파독간호조무사가 되어 건너간 독일에 정착하여 ‘마리아 이모’와 ‘선자 이모’, 그 밖의 많은 파독 간호 여성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수많은 ‘이모’들의 보살핌 속에서 해미는 자신보다 앞서 타국에 자리잡기 위해 온 힘을 다했을 파독간호사들의 건강한 활력과 긍정성에 감화된다. 그 여성들이 가족과 국가를 위해 삶을 희생한 집합체가 아닌 개별 주체로서 내뿜는 고유한 개성과 매력을 접하며, 해미는 멈춰 있던 일상을 조금씩 재가동한다.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을 정도의 아름다움이지?”
나는 갑작스러운 말에 흠칫 놀라 선자 이모를 돌아다보았다. 선자 이모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흰빛이 너울대는 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 쪽을 향하고 있었다.
“내년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걸 볼 수 있을 테니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아름답지?”
언제나 표정이 적어 화난 것처럼 보이던 선자 이모의 얼굴에 드리워진 꽃그늘이 바람이 불 때마다 레이스처럼 어른거렸다. 마리아 이모가 우리를 웃기기 위해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할 때마다 꽃물이 번지듯 환해지던 선자 이모의 얼굴.(74쪽)
마리아 이모의 딸 ‘레나’, 선자 이모의 아들 ‘한수’를 사귄 후 해미의 독일 생활은 더욱 찬란히 빛나기 시작한다. 한수가 해미와 레나에게 비밀스러운 부탁을 해오면서 세 아이의 우정은 한결 끈끈해지는데, 그 부탁이란 한수의 엄마인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함께 찾아달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첫사랑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선자 이모의 일기를 몰래 읽어나간다. 일기 속에는 선자 이모가 1973년 독일로 떠나온 후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간직해온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흩어져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첫사랑의 이니셜이 ‘K.H.’라는 사실뿐. K.H.를 찾기 위해 온갖 추리와 상상을 펼치며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동안, 해미는 점차 밝고 천진한 모습을 되찾아간다.
나는 도시를 조금씩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곳이 내 자리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 가족도 행복에 거의 가까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언니가 떠오르면 죄책감이 느껴질 만큼의 행복이었다. 죄책감이 가슴을 쿡쿡 찌를 때마다 속으로 언니에게 말을 걸어야 했을 만큼의 행복.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109쪽)
그러나 자신이 있을 곳을 드디어 마련했다는 따스한 안도감도 잠시,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해미는 또 한번 커다란 상실을 겪은 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해미는 여전히 유년의 비극에 붙들려 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과의 깊은 교류를 자제하며 지내던 해미는 어느 날 대학 동창이면서 미묘한 연애 감정을 주고받기도 했었던 ‘우재’와 우연히 재회한다. 그리고 해미의 마음을 열기 위해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우재로 인해 타인을 향한 해미의 감각이 다시금 깨어나기 시작한다. 해미는 다시 한번 선자 이모의 일기를 읽으며 K.H.를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오랫동안 고스란히 묻어두었던 상처를 들추어 실패로 남겨두었던 지난 일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우재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볼 수도 있으리라 믿으며.
이제, 거대한 슬픔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여렸던 어린 자신과 대면하기 위한 해미의 용기 있는 전진이 시작된다.
슬픔의 터널을 지나 쏟아지
천수경
4.0
요즘 날이 더워져서 밤 운동을 아침 운동으로 바꾸고 싶은데 차마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내가 매일 밤 열두 시쯤에 스치는 강변의 어느 벤치에 아샤가 앉아 있을지도 몰라서다. 아샤는 모르도바에서 온 열여덟의, 혼자 음악을 들으며 일기를 끄적이던 사람이다. 내가 자전거를 세우고 무얼 하고 있는지 물어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 시간대에만 느낄 수 있는 강의 한숨 덕분이었을 것이다. 아샤는 ‘어젯밤이 끔찍한 밤이었어서’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라고 했다. 아샤의 스프링 노트에 범람한 문장들은 어차피 내가 모르는 언어였는데도 아샤는 부끄럽다는 듯 노트를 가렸다. 끔찍했던 게 오늘 밤이 아니라 어젯밤이라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전거로 빠르게 스칠 땐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앳되었다. 무슨 일이 그렇게 끔찍했는지 묻지 않았다. 모르도바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는지 물었을 때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대답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모델 일을 하는지도 묻지 못했다. 대신 이 도시에 친구가 있는지 물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잘 지내지만, 본인은 내향인이라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모델 일은 외향인들의 잔치라며. 말을 건 게 미안해지려던 찰나, 아샤는 말을 걸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서울에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며. 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길래 나는 서른이라고 했다. 자신의 오빠들과 동년배라면서 오빠 둘, 남동생 둘이 있는 특이한 가족 관계를 일러줬다. 나도 남동생이 둘 있는데, 너에겐 무슨 일이 일어난 거니. 아샤는 부모님의 사랑..? 하면서 웃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구나. 일에 치여 영혼을 회복해야 할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이만 따릉이를 반납해야 한다고 했다. 따릉이 사용법까지 간략하게 설명해줬다. 연락처를 주고받는 대신 나는 매일 밤 이 시간에 여길 지나니까, 혹시나 나랑 또 얘기하고 싶으면 야밤에 그 벤치에 앉아 있으면 된다고 했다. 아샤는 우리가 곧 또 볼 것처럼 인사해줬다. 모델 일보다는 컨셉을 디자인하고 옷을 직접 만드는 일이 더 흥미로운 분야인 것 같다던 말 때문이었는지, 나는 이제 운동을 갈 때마다 아샤와 재회할 가능성을 점쳐 본다. 아샤, 네 이름을 느리게 발음하면 바로 우리가 발붙인 이 대륙의 이름이 되지. 여름이 겨울에 미련을 덜 가진 시간에 우리가 또 만나게 된다면, 나도 실은 그때 괴로운 밤들의 진창 속에 있었다고 말해줄게. 그리고 우리 동네를 구경시켜주고 싶어. 미술 학원이 자랑거리로 내놓은 그림이 걸려 있는 나무 앞에는 이따금씩 코뿔소 그림을 들여다보는 행인이 있고, 오후 한두 시쯤에 초등학교 근처 횡단보도 앞에서 “정지선을 지킵시다” 깃발을 드는 두 명의 할아버지도 보여주고 싶어. 비가 오는 날에도 선글라스를 끼는 그분들이야말로 우리 동네의 파수꾼들이야. 그들의 지휘에 맞춰 길을 건너는 초등학생들은 멀리서 보면 꽃밭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착장이 알록달록해. 그리고 매일의 날씨를 꼭 제 색깔에 연루시키는 아름다운 나무들을 죄다 구경시켜줄게. 빗물을 이파리들의 정수리에 간직해뒀다가 비가 그치고 부는 바람에 뒤늦게 흘려보내는, 쏴아-하고 때 늦은 소나기를 내리는 나무들. 끔찍한 밤 같은 건 꼭 다음 날이 되어야만 기록할 수 있듯. 그 유예가 네 마음에도 들었으면. 먼 곳이 너무 그리워질 때면 버스 터미널 앞 이삭토스트에 앉아있으면 돼. 다른 도시로 떠나가는 버스들이 강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걸 볼 수 있거든. 지하철역을 떠받치는 기둥을 타고 자라는 넝쿨들이 얼마나 태연하게 변신하는지 보려면 우리 동네를 조금 오래 봐야 하는데. 네가 몇 계절이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지옥이라고 여겼던 곳도 누군가에겐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한 곳이었을 테니. 그 사실이 너에게도 조금은 위안이 되길. 인간은 너무 이상해서 별걸 다 그리워하게 되더라고. 그래서 삶이 끔찍하고 또 견딜만 한 거겠지. 내가 네 손목을 잡아끌고 돌아다니지 않아도 너는 이곳에서 네 자리를 찾지 않을까. 오늘 밤엔 우리가 만나지 못하더라도 네가 달게 자길. 다음에 보면 무슨 음악을 듣는지도 꼭 물어볼게.
귤귤
4.0
가족도 친구도 막역해본 적 없어서 늘 어딘가 어색하고 조급하던 날들이 생각난다 그대로도 괜찮았을텐데
희수
4.5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이정인
5.0
중간중간 서사적인 동력이 약한가 싶을 때마다 꾹 눌러쓴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을 세게 때린다. 백수린표 문장의 힘은 장편에서도 강력하다. 아, 이게 소설을 읽는 맛이지. 수없이 슬퍼지다가도 마음이 이내 몽글몽글해지고, 다정함의 힘에 따스해진다. 종종 하루는 외롭고 죄책감에 휩싸여 힘겹다가도 우린 다시금 일어나겠지.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simple이스
4.0
씻을 수 없는 아픔마저 삶의 동력이 된다는 것.
134340
3.5
사무치는 그리움만으로도 세상은 눈부실 수 있다
징니
4.5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노지운
3.0
좋긴 좋은데, 온실 속 절제된 감정들만 담아냈다는 인상이 뇌리 한 켠에 계속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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