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환상》은 제 여러 작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작품입니다”
-오노레 드 발자크, 1843년 3월 한스카 부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오노레 드 발자크는 다작하는 작가였다. 그는 스스로를 ‘갱도에 갇혀서 곡괭이를 휘두르는 광부’나 ‘펜과 잉크의 도형수’에 비유하곤 했다. 발자크는 하루에 오십 잔의 커피를 마시며 열두 시간에서 열여덟 시간 동안 엄청난 속도로 글을 써내려갔다. 발자크는 자신의 작업이 단테의 신곡과 비견될 인간희극이라는 방대한 체계 아래 묶이기를 원했으며, 대혁명 이후의 사회를 정밀하게 묘사하며 ‘하나의 완전한 역사’를 쓰려고 한다.
《잃어버린 환상》은 1836년에서 1843년 사이의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집필된 작품이다. 이는 일 년에 평균 네 편 이상의 장편소설과 백이십 명 이상의 인물을 창조하였던 발자크의 집필 속도에 비추어 보았을 때 발자크가 《잃어버린 환상》에 기울인 노력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잃어버린 환상》의 방대한 내용은 압도적이다. 그 자신이 한때 인쇄업자이기도 했던 발자크는 고풍적인 인쇄소를 완벽하게 묘사해내며, 종이의 유래와 역사, 근대문학과 신문 문예란, 독자와 대중 연극, 문학 작품의 유통 메커니즘과 비평 등 당대 문학의 생산과 유통, 소비의 전 과정을 완벽하게 그려낸다.
《인간 희극》의 구성에서도《잃어버린 환상》은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인간 희극》은 풍속 연구, 철학적 연구, 분석적 연구의 세 부문으로 되어 있고, 《인간희극》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풍속 연구는 다시 사생활·지방생활·파리생활·정치생활·군대생활·전원생활의 여섯 분야로 갈라져 있다. 《잃어버린 환상》은 <지방 생활 정경>과 <파리 생활 정경>의 연결고리로서, 현대사회 풍속 연구의 바탕이 되고 있다.
작품의 주제 면에서도 ‘운명의 협력자로서의 이상적인 커플’과 ‘이상적인 이념적 결사 구성’이라는 큰 축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인간 희극》에 속하는 전체 작품을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묘사 측면에서 발자크는 자연과학에서 자연 현상들을 서술하듯이 사회의 여러 종류를 분류하여 그에 따른 사회적 삶의 양상을 어느 한 부분도 누락시키지 않고 폭넓게 포착하고, 제반 사회적 현상은 물론 그 원인과 원리를 밝히고자 하였다.
“파리에서는 어떤 것에 대해 환상을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군. 모든 일에 세금이 있고, 모든 것이 돈으로 팔리고, 모든 것이 만들어지니 말이야. 성공까지도.”
《잃어버린 환상》에는 문학과 돈과 귀족에 대한 환상을 통해 서구 근대인이 그 삶의 드라마를 전개하면서 추구하는 정신과 물질과 명예의 꿈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루카치는 이 작품을 “막 태어나고 있는 자본주의의 비극을, 과거의 비극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비극을, 자본주의적 타락에 대항하는 인간투쟁을 재현하고 있는 소설”이라 평하였으며, 《잃어버린 환상》은 플로베르와 도스토예프스키, 헨리 제임스 등 많은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이 출간한 《잃어버린 환상》은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발자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자 이철 전남대 불문학과 교수가 1999년에 낸 《잃어버린 환상》의 번역 초판을 전면 개정한 개정판이다. 역자는 원문과 번역문을 일일이 대조하며 많은 오류를 고쳤고 이렇게 해서 더욱 정밀한 번역본이 다시 태어났다. 발자크 작품은 방대한 작품 수에 비해 국내에 소개된 번역본이 의외로 적다. 하지만 역자 이철 교수는 새로운 작품을 번역하기 이전에 《잃어버린 환상》의 번역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이미 발간한 책을 다시 한번 꼼꼼히 손질하였다. 이것이 국내 유일의 번역본인 《잃어버린 환상》이 문학 번역서로는 드물게 개정판으로 출간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