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성의 삶!
현수성은 1956년 일본 오사카 빈민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주도 출신 불법 체류자였고 어머니는 재일 한국인이었다. 유년기에는 부모와 한 지붕 아래 사는 대신 4명의 아버지와 4명의 어머니 사이를 전전하며 방치되는 보기 드문 불행을 겪으며 성장했다. 지독한 궁핍과 외로움, 그리고 방황의 그늘이 너무도 짙었던 탓에 그가 재일 교포라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괴롭힘은 오히려 사소한 어려움에 불과했다.
일본 사회의 주류에 끼어 평탄한 삶을 누릴 수 없는 운명임을 뼈저리게 깨달은 현수성은 중학교를 졸업한 직후부터 오직 돈 냄새만을 쫓아 뒷골목을 누비기 시작했다. 악덕 사채업, 유흥업소, 전문 도박장, 건설 용역회사, 해결사 사무실 등, 그가 일본 사회의 뒷골목에서 경험했던 일만 해도 28가지나 된다. 심지어 악랄하기로 유명한 야쿠자와 이권을 놓고 다툼을 벌이는 일도 잦았다. 믿을 것은 돈밖에 없다는 생각에 유달리 돈에 집착했던 그는 건설현장의 다양한 분쟁을 해결해주는 용역회사를 설립하여 거액의 재산을 모으기도 했다. 이권을 두고 거세게 충돌하는 욕망들의 각축장에서 합법과 불법을 넘나드는 그만의 수완으로 분쟁 해결 전문가라는 직함도 얻게 된다.
일본의 슈퍼히어로가 되다!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결정적인 전환점은 우연히 자신이 백혈병 바이러스 HTLV-1 보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찾아왔다. 누구도 발병 여부를 예상할 수 없지만, 일단 발병하게 되면 대부분의 환자가 일 년 내에 사망하게 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섬뜩한 자각이 들자 현수성은 처음으로 오로지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된다. 남은 생을 평생 이타적인 삶을 살기로 결심한 현수성은 사회적 약자가 차별받지 않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비영리 법인인 소셜 마이너리티 협회를 세운다. 그리고 남은 재산을 정리하여 일본 최고의 환락가 한 구석에 구호센터를 개설하고, 근 십 년 가까이 절망에 빠진 일본인들을 위한 구제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현수성의 활동이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그의 굴곡진 삶만큼이나 독특한 구호 활동 때문이다. 구호센터를 찾는 일본인은 실로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악덕 사채업자의 횡포로 가산을 탕진하고 자살을 결심하거나, 실연의 아픔으로 더 살아갈 의욕을 잃거나, 성폭행의 트라우마로 인해 심신이 황폐해진 여성 등, 참으로 다양한 아픔을 가진 일본인들이 현수성을 찾아 도움을 요청한다. 최근에는 가족 간의 폭력 사건도 상당수를 차지한다. 심지어 집을 나간 아내를 찾겠다며 칼을 들고 구호센터로 달려든 사람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공적 구호 체계의 안전망 밖에 놓인 사람들이다.
현수성이 그들을 돕는 방식은 남다르다. 여느 구호단체처럼 체계화된 매뉴얼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상담자의 기분을 배려하기 위해 판에 박힌 위로나 덕담을 건네지 않는다. 자칫 인신공격이나 조롱으로 비칠 수 있는 그만의 거친 화법을 통해 상담자로 하여금 문제의 핵심을 정면으로 주시하도록 만든다. 자살을 결심한 상담자에게 곧 죽을 거면 가진 돈이나 내놓고 가라고 말하는 식이다.
현실 속 슈퍼히어로를 만나다 - 역자 장은선의 구호센터 방문기
가슴이 뛰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번역하느라 붙잡고 씨름했던 원고 속의 주요 무대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오히려 「현수성」이라는 제목의 만화나 드라마 속으로 이어지는 입구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나는 신주쿠 구호센터를 취재한 책의 번역을 맡으면서 이곳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현실은 소설보다 기이하다더니, 번역하는 내내 읽고 있는 것이 취재기인지 하드보일드 소설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다. 그러니 내가 현실 속의 구호센터에 한번 찾아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누구든지 가벼운 마음으로 오라고 권하는 구호센터의 소개 문구도 한몫했다.
그런데 막상 문 앞에 오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쫓아오는 포주도 빚쟁이도 없는 내가 저곳을 방문해도 되는 것일까. 지난 9년 간 저 문을 두드렸을 일만 팔천 개의 절박한 사연을 생각하니 호기심에 이끌려 무작정 찾아온 자신이 너무 뻔뻔하게 느껴졌다.
그런 내 등을 떠밀어 준 것은 뜻밖에도…….
“여어~ 아가씨, 뭐해? 혼자야?”
거리 헌팅이었다! 8분째 같은 장소에 계속 서 있었더니 낯모르는 아저씨들이 와서 수상쩍은 미소를 띄우며 치근덕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과연, 이것이 가부키쵸인가! 포주에게 쫓기는 마사지걸도 아니고, 빚 때문에 자살하려는 샐러리맨도 아닌 나는 이름 모를 아저씨의 질문 공세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구호센터에 첫 발을 디디게 되었다.
[……]
운 좋게도 바로 첫 방문 날, 원고로만 접했던 소문의 하드보일드 히어로와 마주쳤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을 본 순간, 한눈에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반삭한 머리에 안경을 끼고, 짧게 다듬은 턱수염에 드문드문 흰색이 비쳤다. 그 굵은 팔뚝으로 팔짱을 끼고 등을 젖히면 마치 요새 같은 인상이 풍겨 나온다. 머릿속에서 뜬금없이 「마징가 Z」의 만화 주제가가 들려왔다.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사람~’
“안녕? 한국에서 왔다며?”
[……]
“세상은 호랑이나 사자만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자칼이나 양도 필요하지. 그런데 모두들 사자가 되고 싶어 하잖아. 뭐, 노아의 방주까진 안 가더라도 골고루 있는 게 좋아. 그런데 사자 외의 동물은 전부 실패자로 보더라고. 거리에서 쓰레기를 청소하는 사람을 천대하는 시선이 있는 한, 이 문제는 해결이 안 돼. 그걸 실패한 인생으로 보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도 있는 게 바람직하지……”
[……]
나는 이후로도 종종 구호센터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곳은 내 허세를 버리고 무장해제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이다. 구호센터에 있으면 엄청난 고통과 무법천지가 세상에 펼쳐져 있음을 끊임없이 깨닫게 된다. 그 앞에서 나는 어리석고 무력하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걸, 구원은 항상 존재한다는 걸 신주쿠 구호센터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깊은 밤, 하늘에 박쥐 전등을 비추어도 배트맨은 오지 않지만, 현수성 소장의 휴대폰은 오늘도 24시간 대기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