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흑인과 언어
002. 유색인 여성과 백인 남성
003. 유색인 남성과 백인 여성
004. 식민지 민중의 의존 컴플렉스
005. 흑인성이라는 사실
006. 흑인과 정신병리
007. 흑인과 인정투쟁
008. 결론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프란츠 파농 · 인문학
292p
구매 가능한 곳
본 정보의 최신성을 보증하지 않으므로 정확한 정보는 해당 플랫폼에서 확인해 주세요.
본 정보의 최신성을 보증하지 않으므로 정확한 정보는 해당 플랫폼에서 확인해 주세요.
상맹
3.5
피식민자들에게는 정신 분열이 당연하다. 자기를 혐오하게 만드는 식민화과정. 백인성이 목표이고 구원인 사회에서 어떻게 피식민자들은 이를 받아들일까. 후에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나온 갈 곳 잃은 폭력 관리되는 폭력 그리고 탈식민에서의 폭력까지. 사실 2021년에서 그리고 피식민자의 열등감을 거의 털어낸 한국에서는 의문이 들긴하지만 그래도 재밌었던 저작.
윤정
3.5
"백인의 노예가 된 이후 그들은 스스로를 노예화한다." - 256쪽 아들러나 융, 헤겔의 사상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이 없어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울림鬱林
4.5
"나는 결정적인 진실들로 무장하고 있지 못하다. 본질의 섬광이 내 의식을 뚫고 지나가지도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아주 차분한 마음으로, 어떤 일들은 말해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 p.1 얼마 전 한 선생님께서 우리반 여학생들에게 하셨던 말이 있다. "예전과 다르게 요새는 여학생들 얼굴이 '상향평준화'된 것 같아. 화장도 잘하고, 옷도 잘 입고 다니니까..." 휴대폰이 대중화되고, 미디어 산업이 거대한 발전을 이루었다. 이젠 SNS에 키워드만 검색해도 최근에 유행하는 화장법과 패션이 등장하고, 지하철과 거리엔 광고판이 가득하다. 인구당 성형 건수가 세계 1위인 나라도, 화장품 산업 규모가 세계 3위인 나라도 바로 한국이다. 어쩌면 선생님의 말씀은 시대를 완벽히 관통한 진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처 묻지 못했던 물음이 하나 남아있었다. 얼굴에 위아래가 있는가? 있다면 그 기준은 누가 결정한 것인가? 왜 여성의 얼굴은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꾸미고 개조해야 되는 대상이 되었는가? 10-20대는 사람이 한 사회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온전히 이해하는 시기이다. 주어진 외모, 신체, 성향, 그리고 환경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여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 여성들의 성형 경험률이 가장 높은 시기가 바로 10-20대이다. 조금 더 눈이 커 보이도록. 피부가 하얗게 보이도록. 코가 높아 보이도록. 그렇게 그들은 수십, 수백만원의 비용을 내고 미래를 꿈꾸며 마취된다. 그럼 의문이 든다. 코가 낮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눈이 작은 여성은 그들에게 어떤 존재인 것일까? 왜 그런 사람을 우린 광고에서 볼 수 없으며, 그렇기에 욕망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1952년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마르티니크 출신 흑인 작가 프란츠 파농이 쓴 책이다. 화장품이나 성형에 대한 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와 조용히 맞닿는 단어가 있다. 바로 '두려움'이다. 이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 불안, 그리고 자기 소외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계속해서 의심하게 만든다. 단지 외형만으로 말이다. 2차 세계대전의 폭풍이 잦아들던 20세기 중엽, 노예제가 폐지된 건 이미 100년이 넘은 시기였다. 유럽 사회는 더 이상 흑인, 아랍인, 유대인 등에게 신분으로서 차별을 두지 않았다. 특히 유럽인들은 연합군으로 전쟁에 참여한 식민지인들을 더 이상 노골적으로 혐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사이엔 묘한 위계감이 존재했고, 그런 감정은 그들의 자의식에도 고스란히 내재되어 있었다. 백인이 흑인을 바라보는 시선뿐만 아니라, 흑인을 백인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말이다. 작가는 당시의 사회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프랑스 병원에서 백인 의사는 백인 환자들에게 정중하고 공손한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가 흑인이나 아랍인들을 대할 땐 어쩐지 친근하고, 익살스러운 어조가 된다. "... 그래. 어디가 아픈가, 친구?" 정중한 흑인이 유창하게 프랑스어를 구사하면 백인들은 칭찬한다. "정말 프랑스어를 잘 하시네요!" 설령 그가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인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가 태어난 마르티니크는 어떨까. 흑인 여성은 백인 남성과 결혼하기를, 흑인 남성은 백인 여성과 결혼하기를 간절히 고대한다. 흑인 여성이 백인 남성에게 청혼받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축제 분위기가 된다. 교육받은 흑인일수록 그들은 자신보다 어두운 피부색의 연인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혼으로 빛나는 세계의 주인인, 유색인들을 지배하는 인종과 완전히 동등해진다고 여긴다. 마르티니크인들은 악몽을 꾼다. 그들은 꿈에서 검은 황소, 검은 인간, 검은 군대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숲에서 정처없이 헤맨다. 토착 아프리카 사회에서도, 유럽 사회에서도 소속될 수 없는 흑인 청년들은 방황한다. 그렇게 병원에 찾아간 이들은 다음과 같은 진단을 받는다. '흑인 유기공포증 환자'. 유아기로부터 비롯된 이 기형적인 질병은 그들이 '흑인'이라서 발생한 게 아니다. 단지 신경증 환자인 그들이 우연히 흑인이었을 뿐이다. 백인들 중에서도 흑인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흑인 유기공포증을 느끼는 환자들이 있다. 그들이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파농은 말한다. "... 그가 마다가스카르인이라면 그의 증상은 백인이 당도했기 때문이며 살아가다 어느 순간에 자신이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야 한다는 의문을 품게끔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간으로서 그들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정도로 백인이 되려는 욕망에 잠겨 있는 것은 열등 콤플렉스를 생성시키는 사회, 이 콤플렉스로부터 견고한 안정감을 이끌어내는 사회, 한 인종의 우월성을 확인해주는 사회에서 그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 불확실한 자아로 고통받는 이들을 신경증 환자로 낙인찍는 걸 멈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환자가 자신을 괴롭히는 무의식을 의식화하고, 더이상 망상적인 백인화를 시도하지 않으며, 또 사회 구조 자체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불안과 증오가 개인에게 선천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한 개인이 태어날 때부터 마주하고 수용하는 언어, 교육, 미디어, 문화, 그리고 그로부터 형성되는 무의식에 대해 얘기한다. "말한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어떤 문화를 떠맡고, 어떤 문명의 무게를 받치는 것이다. (...) 사람은 언어를 소유하게 되면 결국 그 언어가 표현하고 의미하는 세계를 소유한다. (...) 언어는 '헤매는 육신에 깃든 신'이다." 마르티니크 어린이들이 배운 프랑스어에서 '하양'은 빛, 순결, 선, 정의, 신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검정'은 어둠, 타락, 악, 부정의, 성욕을 나타낸다. 프랑스어의 관용 표현은 하얀 것을 긍정하고, 검은 것을 부정한다. 마르티니크 어린이는 학교에 가면 토착어인 크레올어를 경멸하도록 배운다. 크레올어는 우습다고. 어떤 집안에서는 크레올어를 금하고, 엄마들은 그런 말을 쓰는 아이들을 놀려준다. 식민지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흑인들은 프랑스어를 배우며 자신들의 피부색을 부정하는 표현을 익힌다. 파농은 동시에 지적하는 건 미디어이다. "어린 백인들을 대상으로 백인들이 쓴 만화책들. 책에서 늑대, 악마, 악령, 악, 미개인은 언제나 검둥이 아니면 인디언으로 나타난다. 아이들은 언제나 자신을 이야기 속 승자와 동일시하므로, 검둥이 아이는 백인 아이만큼이나 쉽게 '검둥이 악당들에게 먹혀버릴 위험이 있는' 탐험가, 모험가, 선교사가 된다." 미국의 문화비평가 레그먼은 이렇게 설명한다. "1938년에 여섯 살이던 미국 어린이는 그때 이미 1만 8,000개의 잔혹한 고문과 유혈 폭력의 장면을 흡수하게 된다." 학교에서 프랑스식 교육을 받는 흑인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토착 조상이 아니라 미개인에게 진리, 온통 하얀 진리를 가져다준 백인, 모험가이자 문명인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렇게 흑인 아이들은 자신을 '미개한 흑인'이 아니라 '문명화된 백인'으로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 자아분열이 나타난다. 타자의 시선에서 그들은 어디를 가든 언제나 '검둥이'다. 그리고 유럽에서 검정은 악을 암시한다. 파농은 식민지 교육자들을 거세게 비판하고, 흑인 아이들이 자신을 백인으로 정체화하게 한 건 그들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처음 유럽에서 노예제가 폐지된 이유는 단지 인도주의적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공장에 필요한 저임금 육체노동자들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흑인들이 자유를 직접 쟁취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다. 결국 잘못된, 위계적 구조가 흑인의 무의식에 자리잡았기에 파농은 그 누구도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럼 파농이 바란 것은 무엇일까. 백인에 대한 복수? 거대한 혁명? 백인에 대한 흑인의 우월성을 밝혀내는 것? 아프리카의 찬란한 역사를 증명하는 것? 모든 백인들이 흑인에게 단체로 사죄하는 것? 그는 얘기한다. "검둥이의 사명은 없다. 백인의 짐도 없다. 그리고 나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 되어야 할 의무가 없다..." 그리고 정중하게 요구한다. 인종을 떠나서, 타자에게 사람다운 처신을 요구할 권리. 내 선택을 통해 내 자유를 버리지 않을 의무. 어떤 흑인의 삶이 그가 속한 집단의 가치를 결산하는 데 바쳐져서는 안 된다. 인간은 역사의 포로가 아니다. 인간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유색인의 불행은 과거에 노예였다는 것이며, 백인의 불행은 과거에 집단살해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때로 다신 돌아가지 않을 것을 함께 약속하면 된다. 그로부터 진정한 소통이 시작된다. 우월? 열등? 왜 그저 단순히 타자를 만지고, 타자를 느끼고, 나에게 타자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해보지 않을까? 마침내 그는 기도한다. "... 내가 언제나 질문하는 사람으로 남기를!" 70년 전 파농이 외친 말은 여전히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통찰하고, 또 위로한다. 당시 그가 던진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 공허한 '정상성'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애타게 짓눌렀던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자기혐오와 죽음으로 내몰았던가. 사실 우열이나 열등은 실재하지 않는 개념인데. 모두가 무겁게 떠받치는 문화의 무게를 조금은 내려놓자. 그리고 나는 지금의 당신을 사랑한다. 너저분히 옭아맨 하얀 가면을 벗어내자. 함께 자비롭고 성숙한 세계를 만들어자고 기꺼이 외친다.
노태용
4.0
조금 어렵긴 하지만, 꾸역 꾸역 읽어나가면 '결론에 즈음하여' 에서는 크게 보답 받을 것! "오 나의 몸이여, 내가 언제나 질문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를!"
Move
4.5
탈인종주의에 대해 끊임없이 상기하고 묻는 게 정답일까
yonyon
4.0
“그러나 나는 온 존재를 걸고 이 불구화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영혼이 세상만큼이나 크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깊은 강물만큼이나 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무한대로 확장이 가능한 가슴을 가지고 있다. 나는 무엇인가를 주도록 창조되었다. 저들은 이런 나에게 절름발이의 겸양을 받아들이도록 닦달한다. 어제 나는 눈을 뜨고 마침내 만개한 하늘을 보았다. 나는 당장 일어나고자 했으나 내장이 다 드러난 침묵이 마비가 된 날개로 나를 덮쳐왔다. 잘못한 일도 없는 나는, 무無와 무한無限의 교차로에 서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176쪽)
robin
4.5
우리모두 내가 갖지못함것에 대한 욕망이 있다.백인이 가진 하얀피부 가질수 없어서 더 간절하다.
이상건
3.5
폭력을 비난하기 전에 폭력의 기원을 생각하다. 폭력의 옹호, 정당화가 아닌 ‘폭력에 대해 비난’하는 다수의 폭력,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무오류라 생각하는 오만함에 대한 저항이다.
더 많은 코멘트를 보려면 로그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