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끌림의 특별한 지속
‘사랑’이라는 단어만큼이나 흔한 말이 어디 있겠는가? 일상적으로 부르는 엄마, 아빠만큼이나 사랑이란 단어는 너무도 흔하게 듣는 말이다. 그러나 엄마와 아빠라는 단어가 아무리 흔히 불려도 그것이 ‘나의’ 엄마와 아빠로 한정될 때, 그 흔한 말은 듣는 이로 하여금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사랑’이란 말도 이와 같다. 그래서 아무리 흔한 사랑이라고 웃어넘겨도 각자에게 사랑은 너무도 소중하고 특별한 무엇이다. 그 이유는 사람에 따라 약간씩은 다를지 몰라도 사랑이 주는 특별한 끌림, 감정의 몰입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끌림의 감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리고 이 끌림의 실체는 단순한 감정일까, 아니면 이성적 판단일까?
오래 전부터 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란 주제에 관해 연구하고 나름대로 그 본질은 이런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람은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을 만들어내게 한 플라톤이나 《연애론》을 쓴 스탕달, 그리고 《사랑의 기술》을 쓴 에리히 프롬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처럼 사랑의 이데아가 있고 그 이데아의 그림자를 쫓든, 스탕달처럼 사랑이란 감정의 눈속임이며 환영에 불과하므로 사랑이란 부질없는 짓이라고 하든, 아니면 에리히 프롬처럼 사랑이란 인간과 인간이 맺는 관계의 특별한 형태이며 인간의 사회화 과정과 결부된 감정의 교류라고 보든, 사랑이란 복합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최근 생물유전자학 쪽에서는 페로몬이라는 감정 호르몬이 이 끌림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듯 사랑이란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든 사회적 또는 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든 끌림의 과정이며 끌림의 특별한 지속이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말하는 인간의 영원한 숙제, 사랑
《사랑에 관한 연구(Estudios sobre el amor)》는 바로 이 끌림의 문제에 주목해서 사랑이라는 난해한 주제를 다룬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작품이다. 알다시피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스페인이 낳은 세계적인 철학자이자 탁월한 문화비평가로, 특히 《대중의 반란》,《예술의 탈인간화》등의 저서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특히 현대의 대중문화나 예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의 이론의 핵심은 근대 철학의 근간인 이성과 현대 철학의 주된 화두인 인간의 삶을 결합한 생-이성 이론이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철학의 임무가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전망하고 이끄는 것이라는 사회철학의 기본 명제를 충실하게 지킨 사람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언론이나 방송 등을 통해 활발하게 대중 활동을 했었고, 1930년대 초에는 프리모 데리모라의 독재 정권에 항거하기도 했다. 1936년 반정부 활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그는 아르헨티나로 망명하게 되는데, 망명 생활 가운데 나온 중요한 저서가 바로《사랑에 관한 연구》다. 《사랑에 관한 연구》는 강연이나 방송, 그리고 잡지 등에 발표한 글을 모은 일종의 글모음집인데, 출간되자마자 독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은 책이기도 했다. 대중적 명성과 인기가 작용한데다가 글이 발랄하고 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1940년에 초판이 출간된 이 책은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 일관된 철학적 논의를 편 책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주제에 관해 때로는 논쟁적으로, 때로는 문학적으로 다룬 일종의 철학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사랑이라는 하나의 현상, 또는 본질에 대해서 매우 감동적인 경구나 인용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한편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글 하나하나에서 ‘사랑의 비밀’을 퍼즐 맞추듯 추적하면서 자신의 경험과 해석에 비추어 자유롭게 교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사랑이란 이런 것이라는 무언가 명확한(?) 답을 찾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답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을 잘못 파악하게 만들 수도 있다. 어쩌면 가세트의 말처럼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이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이 만든 궤도를 타는” 행위이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은 절박함과 다급함을 갖고 집착하는 “대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시련”일지도 모른다.
《사랑에 관한 연구》, 유쾌한 혹은 발랄한 사랑의 미로 찾기
가세트는 이 책에서 사랑의 본질에 대해 매우 확고한 자기 논리를 갖고 말한다. 신칸트주의자답게 그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도 이성적인 대답을 준비하고 있다. 그 대답은 가장 순수하고 이성적인 의미의 사랑이란 가장 순수하고 지고한 사랑인 까닭에 쉽게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랑이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사랑’과 ‘사랑들’이라는 말로 본질과 현상을 구분하고 ‘사랑들’을 하는 우리 보통 사람이 ‘사랑’을 하려면 더 많은 성찰과 사색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들’이기 때문에 가세트는 이 책에서 다양한 ‘사랑들’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지닌 의미들을 추적한다. 이런 방식은 매우 간접적이며 은유적이어서 마치 미로를 찾아가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가세트가 펼쳐 놓은 논리의 미로를 따라가면서 그가 제시하는 다양한 사랑의 방식을 보는 것이야말로 도리어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누리는 즐거움이다. 문학과 역사, 문화와 철학이라는 지적 영역들을 넘나들면서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름의 목소리를 내었는지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 혹은 사랑과 비슷한 감정이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잣대가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평가되고 가늠되었는지 비교해보는 묘미도 준다. 자신만의 특수성을 세계적인 보편성과 견주어보는 기회를 독자들은 갖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 책이 주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뿐만 아니라 사랑을 하거나 삶을 살아가면서 이런 게 어떤 감정인지, 이게 정말 순수한 사랑인지 끊임없이 의문을 던졌던 독자라면 가세트의 날카로운 통찰이 묻어난 이 책 속의 한마디 한마디에 ‘앗!’ 하고 탄성을 내지를 것이다. 아니, 답답했던 마음속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쏴 하고 부는 것을 느낄지도 모른다.
스페인에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대중적 사랑을 받아온 철학 에세이《사랑에 관한 연구》가 이제야 한국어로 처음 번역되었다. 그동안 스페인 문학이 유럽 문학의 중요한 영역이었음도 불구하고 상업적 논리와 무관심에 묻혀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스페인 문학을 전공하는 역자의 공들인 번역, 그리고 가세트의 경쾌하면서도 종횡무진으로 펄떡거리는 논리와 만나는 것은 남다른 재미를 줄 것이다.
지금 사랑에 빠졌거나 회의하는 사람, 또는 사랑을 간절하게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은 하나의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사랑이라는 도저한 진실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이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진정한 목소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