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의 처마 끝, 천장 깊숙한 곳,
굴뚝의 연기 속, 전각의 가장자리에 숨어
불과 액운으로부터 궁을 지키는 '동물 순라군' 이야기
궁궐에 갔을 때 처마 위의 잡상을 보고 '저게 대체 뭐지?' 하고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저게 어처구니란 건데,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가 있어"라고 아는 척해본 사람 정도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는가? 사실 경복궁에는 광화문의 해치와 근정전의 28수 별자리 동물을 포함해 100여 마리의 동물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이 동물들은 기거하는 장소(방위, 건물 용도, 거주자)에 따라 각기 다른 유래와 세계관을 품고 별스러운 표정과 포즈를 하고 있다. 예컨대, 광화문을 들어가면 맞닥뜨리는 영제교 밑에는 혓바닥을 날름 내밀고 있는 '천록'이 있다. 천록은 상상 속의 동물로, 온몸이 비늘로 뒤덮이고 뿔이 난 노루 모양의 신수인데,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는 천록을 '뿔 끝에서 오색 광채가 나며 하루에 1만 8000리나 달린다'고 설명한다. 천록은 외부의 침입과 흉한 기운을 막는 '벽사'의 의미로, 보통 문 앞이나 다리 위, 무덤 입구에 두곤 했다. 경복궁 영제교의 천록은 다리와 물길을 건너오는 액운으로부터 궁과 왕을 지키기 위해 놓인 것이다.
이 책은 다른 궁궐 가이드서와 달리 궐내 전각의 모양이나 내력을 살피지 않는다. 경복궁의 남문 광화문에서 북문 신무문으로 향하면서 다리 밑, 처마 끝, 월대 가장자리, 천장 깊숙한 곳, 굴뚝 밑 돌담까지, 남들이 들여다보지 않는 구석구석을 톺아보며 73마리의 동물을 좇는다. 동물이라는 새로운 키워드로 궁궐을 돌아볼 때, 무심코 지나쳤던 과거의 유물이 생생하게 움직이는 환상적인 체험을 선사한다. 특히 각 동물 캐릭터의 상세한 표정과 포즈를 구현한 일러스트 덕분에 당시의 철학, 이상세계, 아름다움을 '시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해치, 봉황, 용, 현무뿐 아니라 불가사리, 귀면, 산예, 공복, 달두꺼비까지, 다양한 동물이 각자의 사연을 품고 어디를 지키고 있는지, 경복궁이 오늘날까지 살아남기를 바라며 과거의 사람들이 어떤 메시지를 남겼는지 찾아가는 새로운 궁궐 역사 가이드서다.
물을 머금은 광화문의 입 벌린 용,
경회루를 지키는 기린과 코끼리,
각자의 임무를 맡은 동물들
《경복궁 환상 여행》은 광화문에서 자신의 '수호동물'을 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광화문에 해치말고, 3문 천장에 동물이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왕이 드나드는 중앙문 천장에는 봉황이, 동문에는 용마가, 서문에는 거북이 쌍으로 노닐고 있다. 문관이 출입했던 동문으로 입장했다면, 당신의 수호동물은 하늘을 나는 용마! 용마는 '용의 머리'에 '말의 몸'을 한 신수로, '현명한 군주가 있을 때 용마가 나타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왕의 행차 때 의장기로 사용된 동물이다. 아기장수 '우투리'도 조선을 세운 '이성계'도 용마를 타고 왔다고 전해지니, 용마는 곧 '왕의 위엄'을 상징한다.
수호동물을 정했다면 광화문 안쪽으로 들어와 지붕 끝을 올려다볼 차례. 고개를 올리면 '아' 하고 입을 벌린 용의 형상이 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면 턱 밑에 웬 기호가 보인다. 이는 바로 《주역》의 팔괘 가운데 하나인 '감괘(?)'로, 물을 상징하는 기호다. 그런데 왜 광화문 돌벽 위에 '물의 괘'를 새긴 용 머리 모양 물 내림 돌을 올려다둔 것일까? 음양오행상 남쪽은 '불'을 상징한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고, 거기서 남쪽으로 향하면 '관악산'을 마주하게 되는데, 옛사람들은 관악산을 화기가 강한 산이라고 생각했다. 목조건물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당연히 '불'이 아닌가. 하여 물을 상징하는 '용' 모양 '물 내림 돌'에 '물의 괘'를 넣어 이를 퇴치하려 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물, 물, 물인 셈!
경복궁의 남문인 광화문에서 북문 신무문으로 향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각 전각을 지키는 동물과 그들이 맡은 임무, 의미들을 톺아본다. 교태전의 후원 '아미사'에 왜 어울리지 않는 불가사리와 박쥐가 있을까? 지붕 위의 취두에 왜 '칼'을 꽂아둔 것일까? 경회루에는 왜 조선에 살지도 않았던 동물인 '코끼리'와 '기린'이 좌정하고 있을까? 그들이 맡은 임무와 그에 담은 옛사람들의 메시지를 알고 나면, 궁궐 구석구석이 이야기로 넘실댄다.
사방신과 28수 별자리, 칠조룡이 있는 근정전
유일하게 아무 동물도 없는 전각, 건청궁
건물에 얽힌 가지가지 사연들
경복궁에서 가장 많은 동물이 사는 건물은 어딜까? 흥미롭게도 건물의 중요도와 동물의 개수는 거의 일치한다. 국왕이 정무를 보던 곳,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물 근정전에는 계단의 봉황부터 월대의 동물들, 천장의 칠조룡까지 약 60마리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월대의 동물들은 단연 근정전의 백미! 그동안은 이들을 12지신이라 일컬어 왔지만, 2018년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경복궁 영건일기》가 발견되면서 '28수 별자리 동물'임이 밝혀졌다. 28수는 밤하늘의 동서남북에 각각 7개씩 배치되어 있는 별자리를 말하는데, 이에 따라 그동안 미스터리였던 근정전 천장에 있는 일곱 발톱의 칠조룡 또한 중앙에서 사방의 7수를 관장한다는 의미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저자는 고대 중국의 신화집 《산해경》, 《설문해자》, 《삼국사기》등 고문헌과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다양한 민담을 바탕으로 이 별자리 동물들을 포함해 궁궐의 신묘한 동물들을 소개한다.
경복궁에는 근정전처럼 수많은 동물이 지키는 건물도 있지만, 단 1마리의 동물도, 화려한 단청도 없는 전각도 있다. 고종 10년 때 내탕금으로 지어진 고종의 거처 건청궁이다. 경복궁에서도 가장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건청궁은 사가의 양반집처럼 지은 목조건물로, 궁궐 어디에나 있는 잡상조차 없다. 그래서일까? 조선 왕실에서 벌어진 가장 기구한 사건으로 손꼽히는 일들이 바로 이곳에서 벌어졌다. 명성왕후가 시해됐고, 고종은 건청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간 뒤 다시는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우리가 지금 보는 건청궁은 2007년에 복원된 것이다.
유물시선은 이렇게 동물을 중심으로 전각에 얽힌 사연들도 들여다본다. 자경전에 혼자 앉아 있는 해치를 통해 일제가 우리 궁궐을 훼손한 사건을 되짚어보고, 경회루 석교의 용 조각상을 통해 비운의 왕, 단종의 말로를 살피는 식이다. 동물들을 따라 궁궐을 여행하다 보면, 역사책 속에서 딱딱하게만 느껴졌던 사건들과 문화재에 불과했던 건물들이 손에 잡힐 듯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무심코 지나치고,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작은 동물들까지,
유물시선의 감각으로 그려낸 73마리 동물 일러스트
한국의 유물을 독특한 일러스트와 함께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팀 유물시선은 이른바 '본격 한국유물 입덕서' 《백제금동대향로 동물백과》로 금동대향로 '덕후'들을 양산하며 열풍을 일으켰다. 약 65센티미터에 불과한 향로에서 85가지 캐릭터를 찾아내 선보인 '한국판 신비한 동물사전'으로 2030독자들의 '덕심'을 자극했던 것. 그 유물시선이 이번에는 약 43만 제곱미터의 경복궁 구석구석에서 73개 수호동물을 찾아내 현대로 소환한다.
조선을 건국하면서 1395년에 완공된 경복궁은 지은 지 약 200년 만에 전소되었고, 약 270년 동안 폐허로 남겨져 있었다. 1868년 경복궁이 다시 중건될 때, 흥선대원군과 궁궐을 지은 사람들은 건물에서 작은 소품까지 하나하나에 메시지를 담아 배치해두었다. 향원정 연못에서 발견된 '청동 용'은 더 이상 불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경회루의 '기린'은 태평성대를 바라는 마음에서 석교에 놓았다. 왕의 처소인 강녕전 처마 끝에는 '잉어' 모양 토수를 끼워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고, 근정전 월대의 향로 다리에는 불과 연기를 좋아하는 용의 아들 '산예'를 새겨놓고 불을 소중히 모시게 했다. 경복궁의 동물들은 바로 그 메시지의 시각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유물시선은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