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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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언제나 걷는다 철학적 사유는 하나의 걷는 방식이다 균형을 잡고 땅 위를, 말 속을, 생각 속을 이동하는 법이다 최초의 인간은 누구일까? 누군가는 아담이라 말할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루시(최초의 인류 화석)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그들을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주는 끈은 무엇일까? 최초의 인간과 현재의 인간은 생김새도 완전히 다를 테고 생각이나 말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른 부분이 많을 것이다. 그래도 둘 사이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직립보행. 인간을 대표하는 특징은 ‘서서 걷는 것’이다. 네 발로 몸을 지탱하고 땅을 바라보던 존재가 몸을 일으켜 세워 정면을 바라보고 손의 자유를 획득함으로써 변화는 시작되었다. 직립보행을 함으로써 뇌 용량은 커지고 손은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게끔 진화했다. 이것은 다른 영장류와 인간이 해부학적으로 구별되는 가장 큰 차별점이다. 프랑스 국제철학학교와 국립과학연구센터에서 교수와 연구원으로 활동했던 철학자이자 〈르 몽드〉, <르 푸앵> 등의 잡지에 정기적으로 철학과 관련된 칼럼을 기고한 저널리스트로 활동해온 저자 로제 폴 드루아는 걷기가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부분에 주목하면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가 걷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걸음걸이 속에 생각의 단초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엠페도클레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그리스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사상가 27명의 철학을 두루 살피고 그 과정에서 걷기의 메커니즘과 생각의 메커니즘을 고찰한다. 그리고 걷기와 우리 사유의 유사성과 연관성을 확인한다. 저자는 걷기가 그 자체로 인간 존재 방식의 고유한 척도이며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생각을 키워온 생각법이었음을 보여줌으로써 생각의 근육을 키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걸어보라 권한다. 넘어질 뻔해야 앞으로 나아간다 너무 익숙해서 대부분 잘 알아채지 못하지만, 걷기는 불가사의한 운동이다. 일견 우아하고 아름답지만 매우 복잡한 과정이 숨어 있다. 걷기 위해서는 우선 두 발로 선 자세에서 한쪽 다리를 들어 앞으로 던지듯 내밀어야 한다. 그러면 몸은 균형을 잃고 앞으로 추락한다. 추락하는 중 뒷다리를 끌어다가 내민 발 앞으로 옮겨야만 추락을 만회하고 균형을 잡을 수 있다. 그렇게 다리를 움직이면서 상체와 팔로는 무게중심을 잡는다. 물론 섬세한 근육의 움직임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추락과 만회의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우리는 걷는다. 이 복잡한 과정을 정확한 타이밍에 수행하지 않으면 앞으로 넘어져 얼굴이 깨지는 대참사를 겪게 된다. 생각도 걷기와 비슷하다. 걷기는 물리적 활동이고 생각은 정신적 활동이지만 이 둘은 쌍둥이이며, 거울처럼 서로를 비춘다. 생각도 거의 넘어지다가 다시 일어서면서 존재한다. 다시 존재하기 위해 스스로를 파기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우리 사유들에 대한 비판과 합리적인 검토는 그것들을 비틀거리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반박과 비판적 분석은 우리가 명백하고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을 필연적으로 불안정하게 흔든다. 그런데 사유는 자기방어를 하고, 안정을 회복하고, 조금 더 먼 곳에서 새로운 지지대를 찾는다. 그러고 나면 또다시 새로운 반박이 이어지는 식이다. 이처럼 걷기와 생각 속에 작동하는 불균형과 재균형, 또다시 불균형으로 이어지는 운동을 통해 지금까지 인간은 철학을 진화시켜왔다. 두 발로 사유했던 거인들의 짧은 역사1 - 플라톤, 노자, 루소 철학은 걷기처럼 명백하다고 간주되던 사실들을 흔들면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나아가 모든 믿음과 명백한 사실, 신념들을 건드린다. 이렇게 충격을 가하는 일은 예로부터 철학자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이 생각의 거인들은 걷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파고들었다. 서양철학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는 플라톤의 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동굴의 비유’다. 플라톤은 《국가》를 쓸 무렵, 동굴에 꼼짝 못 하고 묶여 있는 포로를 상상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영화관에 앉아 있는 관객이다. 어릴 적부터 영화관 밖에 나간 적이 없는, 그래서 스크린에 비친 영상이 모두 현실이라고 믿는 관객이다. 이 포로들처럼 우리는 우리가 지각하는 그대로가 진실이라고 확신한다. 모두가 자신의 감각을 확신한다. 문제 제기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동굴 밖, 현실로 나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걸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고대 중국의 노자는 자신이 걷지 않고 세상을 걷게 만든다. 그는 정확히 바람처럼 행동한다. 그러므로 걷는 것은 그가 탄 당나귀이지 노자 자신이 아니다. 그럼에도 노자는 일정한 방식으로 걷는다. 가만히 내버려두기 때문이다. 그는 동물이나 바람, 우주가 하는 대로 내버려둔다. 이 절대적 수동성 속에서 그는 실재적이고 궁극적인 힘, 만물의 움직이는 내적 힘을 발견한다. 따라서 걷는 건 세상이지 그가 아니다. 그럼에도 자기 발로 걷는 것보다 더 잘 나아간다. 루소는 고유한 즐거움과 개별적인 미학을 지닌, 그 자체로 완결되는 활동으로 산책을 새롭게 부각시켰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까지 사람들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할 목적으로 걸었다.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했으니 걸을 수밖에 없었다. 즐겁거나 고통스럽거나, 들떠서 걷든 아니면 마지못해 걷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도착이었다. 그러나 루소 이후로는 유용성보다 여정과 즐거움이 중요해졌다. 이후로 그에게 자극받은 낭만주의자들이 산책을 예술로, 하나의 존재 방식으로, 거의 삶의 이유로 만들었다. 단순히 어딘가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유와 즐거움을 발견하기 위한 걷기가 탄생한 것이다. 이로써 얼마나 많은 영감과 생각이 탄생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두 발로 사유했던 거인들의 짧은 역사2 - 칸트, 헤겔, 비트겐슈타인 칸트는 매일 정해진 일정에 따라 움직였다. 오전 4시 45분에 일어나 시계처럼 정확히 일과를 마치고 산책로를 걸었다. 권력과 행정의 중심지인 성을 지나 부르주아들이 살고 있는 구시가지를 거쳐 서민들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부둣가를 지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완전히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향했다. 그는 산책을 통해 온갖 부류의 사람들, 부르주아 계층 또는 서민들을 만나고 그들을 매일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주민들은 그의 산책하는 모습을 보며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 어느 날, 기계가 고장 났다. 급히 신문을 사러 가느라 여정을 바꾼 것이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보편적 선언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에게는 역사의 걸음이 개인적인 여정보다 앞서는 것이었다. 헤겔은 책상에 앉아 글을 쓰거나 수기노트를 펼쳐놓고 앉아서 수업을 하는 정적인 사람이었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칸트가 ‘숭고미’를 언급할 정도로 장엄한 풍광의 알프스를 대하고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 철학자다. 그러나 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생각과 역사, 사회의 걸음을 고민했다. 그가 보기에도 모든 것이 걷고 움직이며 변신하기 때문이다. 그의 ‘변증법’은 세상의 자율적 걷기다. 만물, 그중에서도 정신이 구현되는 인간의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현실의 내적 균열을 가리킨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으나 그 재산을 몽땅 형제들에게 줘버리고 ‘이 세계를 벗어나 걷는 것’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평생 구도자처럼 말과 말 사이를 걸으며,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말하는 현실은 언어 밖에 있음에도 말로써 그걸 묘사하기 때문에 진정한 철학에 다가설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