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수용소에 갇히거나 체포된 사람이 사망했을 때 그 누구도 그들의 친지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가장이 체포되는 순간부터 미망인과 고아의 삶은 시작되었다. 이따금 검사국에서는 남편이 10년간 유형이라는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에게 알리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기도 했다. “다시 결혼해도 됩니다.” 이러한 친절한 허가와 절대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 공식적인 판결이 어떻게 공존 가능한지에 관해 그 누구도 고민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죽음은 유일한 출구였다. 만델슈탐의 사망소식을 알게 된 후 나는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았다.”
스탈린 풍자시를 써 추방자의 삶을 살다가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 오십 만델슈탐
이 작품은 20세기 초 러시아 시인인 오십 에밀례비치 만델슈탐(Осип Эмильевич Мандельштам, 1891~1938)에 관해 그의 미망인이 쓴 회고록이다. 오십 만델슈탐은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이주한 뒤 페테르부르크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다. ‘은세기’(Серебрянный век)로 명명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 시는 푸시킨(А.С. Пушкин)을 전후한 낭만주의 시대 이후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당시 시의 주된 흐름은 상징주의였다.
1910년대부터 상징주의의 신비적 경향과 불명료함.탈현실주의 등에 반대하는 문예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만델슈탐은 그런 시 운동 가운데 하나였던 아크메이즘(Акмеизм)에 참여하면서 문단에 나오게 된다. 1913년 발간된 그의 첫 번째 시집 <돌>(Камень)은 아크메이즘의 선언서 성격을 지닌 시를 다수 포함하고 있으며, 사실적이며 명료한 시어, 건축물과 건축의 원칙 자체에 대한 열광을 특징으로 한다.
만델슈탐은 다른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들처럼 제정러시아 체제에 반대하고 있었고, 변혁을 갈망했으므로, 1917년 일어난 러시아 10월 혁명을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시민전쟁과 그 뒤 일련의 수많은 혼란과 희생을 목격하고, 다시 외면적 안정을 찾은 소련 사회의 경직되며 위선적인 체제를 경험하면서 자신이 시대의 흐름과 함께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그 사실에 혼돈스러워한다.
1920년부터 1925년까지 그가 쓴 시들에는 새 시대의 문턱에서 저물어가는 구시대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꺾인 척추처럼 절단되어버린 과거와 현재를 시를 통해 어떻게든 이어보고자 하는 시인의 노력이 잘 드러나 있다. 새 시대가 내세우고 있는 가치, 그리고 자신과 자신이 소중하게 하는 가치들을 저울질하며 과연 어디에 정당성이 속해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시인의 방황은 쉽게 결론 나지 않았고, 1925년부터 이후 5년 동안 계속된 시인은의 침묵은 이를 보여준다.
1930년 만델슈탐은 다시 쓰기 시작한 시에서, 자신이 시대의 머릿결을 거슬러 서 있으며 늑대 또는 그 늑대를 쫓는 사냥개의 피가 자신에게는 흐르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고백한다.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그의 시는 더 이상 출판되지 않았지만, 능동적이며 적극적이고 직선적이었던 시인은 자기 작품을 통해 시대와의 불화를 당당히 드러냈고 파국은 가까워 왔다.
서로를 별명으로 부른다는 이유만으로도 국가반역음모죄로 강제유형을 당하던 시기에 대표적인 모더니스트였던 만델슈탐은, 구더기같이 토실토실한 손가락에, 바퀴벌레 같은 콧수염을 가진 자가 마귀할멈처럼 혼자 크레믈린에서 전권을 휘두른다는 내용의 스탈린 풍자시를 써 사람들 앞에서 낭송했다. 1934년 5월 13일 그는 체포되었고, 당시 유력한 정치가였던 부하린과 동료 문인들의 중재로 기적적으로 감형받아 보로네슈에서 3년 동안 추방자의 삶을 살게 된다.
고립시키되 목숨만은 살려둘 것!
‘고립시키되 목숨만은 살려둘 것’이라는 스탈린의 지시가 있었다. 국가가 모든 생산을 독점했으며 실업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국가는 추방자 만델슈탐에게 노동의 권리를 박탈했기 때문에 그는 국가가 배급하는 빵을 얻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만델슈탐과 그의 아내는 임시로 구한 일자리나 주변의 감시를 피해 몰래 도와주는 몇몇 옛 친구들의 도움으로 연명하게 된다.
유형을 마치고 모스크바에 돌아왔다. 하지만 이른바 ‘전과자’들은 모스크바를 비롯한 대도시의 105베르스타(약 112킬로미터) 반경 이내에 거주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일정한 거처와 직업 없이 모스크바 근교 마을들을 떠돌아다니다가 1938년 5월 다시 체포된다.
그 후 만델슈탐은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이송되던 중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의 임시수용소에서 심장마비와 협심증으로 사망한다. 1938년에 있었던 이 두 번째 체포는 스탈린 공포정치 시기 새로운 개념으로 등장한 한 번 체포했던 사람을 위험인물로 분류해 반복적으로 체포하여 격리하는 원칙, 이른바 ‘반복수감’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즉 아무런 특별한 기소 근거도 없었음이 만델슈탐의 사후 밝혀진다.
솔제니친이 수용소 안의 삶을 기록했다면, 만델슈탐은 수용소 철책 밖의 삶을 이야기
이 회상록은 만델슈탐이 처음으로 체포된 1934년 5월 13일 밤에서 시작해 두 번째 체포되던 1938년 5월 1일까지 있었던 3년 동안의 시간에 관한 회상이며, 체포 이후 만델슈탐의 불확실한 수용소생활과 죽음에 관해 추정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공식적인 사망일은 1938년 12월 27일이지만, 아무도 그 무엇에 관해서도 확신할 수 없는 시대였으니, 수용소 안에서 일어난 일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미망인은 만델슈탐의 수용소 동료들의 단편적인 기억을 통해 남편의 수용소생활과 사망 시점을 알아내려 했지만, 강제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은 이미 모두 자신들이 실제 본 것과 들은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정확한 시간이나 시간의 흐름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이 회상록에서는 시인이 겪은 전기적 사실 외에도 그 아내가 목격한 시인의 창작 과정이나 시인의 세계인식에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직업과 병’ ‘작업’ ‘걷기와 속삭임’ ‘책과 노트’ ‘사이클’ ‘쌍둥이 시들’ ‘찬양시’ 등과 같은 장이 전자에 속하며 ‘책 한 권만 읽는 사람’ ‘서가’ ‘사회적 건축’ ‘지상과 지상적인 것들’ 등이 후자에 속한다.
좁은 셋방의 절망적으로 단순화되고 고립된 생활은 나데쥬다를 시 창작 작업의 모든 디테일을 관찰할 수밖에 없는 증인으로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만델슈탐 생애 말기 거의 유일한 ‘대담자’였고, 출판되지 않은 후기 시의 몇 안 되는 독자 가운데 한 명이던 미망인의 이런 진술은 만델슈탐의 시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도 값진 자료가 되고 있다.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한 시기인 1930년대를 살았던 시인에 대한 회상록은 역사서가 다루지 않는 당시 삶의 일상과 사회 분위기에 대한 묘사, 더 나아가 이에 대한 저자의 가치 평가와 고찰을 담고 있다. 이반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스탈린 시대 강제수용소 안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한 정보를 준다면,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이 책은 같은 시기 수용소 철책 밖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스탈린 시대의 목격자로 살아남아, 다시는 그런 시대가 반복되지 않도록 후세를 위해 증언
1938년 5월 남편이 체포된 뒤 나데쥬다 만델슈탐은 두 가지 생존 목표를 세웠다. 첫 번째는 만델슈탐의 출판되지 않은 1930년대 시들을 보존하는 것, 두 번째는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면 모든 휴머니즘적 가치들이 붕괴되었던 스탈린 시대의 목격자로서 살아남아 다시는 그런 시대가 반복되지 않도록 후세를 위해 증언하는 일이었다.
첫 번째 목표를 위해 나데쥬다 만델슈탐은 남편의 시의 사본을 만들어 끊임없이 보관장소를 옮겨가며 주변의 사람들에게 맡겼을 뿐 아니라 사본들이 모두 압수될 경우를 대비해 날마다 작품을 암기하는 일을 계속했다. 스탈린 사후 1960년대 초 잡지에 만델슈탐의 다시 시가 실리고, ‘시인의 도서관’(Библиотека поэт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