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이 사랑하는 작가이자 평단과 독자의 신뢰를 두루 얻고 있는 작가 배삼식 희곡. 한국전쟁 발발 두 달을 앞둔 1950년 4월, 경북 안동 김씨댁 여성들의 하룻밤 이야기를 다룬다. 집안을 건사하기 위해 만주를 떠돌며 산전수전 다 겪은 김씨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딸, 며느리, 고모 등이 어렵사리 한데 모인 자리.
서울에서 유학 중인 막내딸이며 대구로 시집간 둘째 딸까지 모두 모여 들썩이는 가운데 이따금 드리우는 부재의 그림자. 때는 바야흐로 1950년. 누군가는 이념을 위해 목숨 바치고 누군가는 이념 때문에 죽어야 했던 과잉된 의미의 시대에 남편은 소식이 없고 아들은 죽었거나 갇혀 있다.
차라리 무소식이 희소식인 불행의 시대. 비극의 와중에도 여성들의 대화는 끊이지 않는다. 소박한 기억과 정직한 기대감으로 가득 찬 이들의 대화는 의미 없이 충만하고 의미 없이 아름답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한가운데에서도 일상을 포기하지 않고 삶의 터전을 지킬 수 있는 건 이토록 의미 없이 충만한 대화가 있어 가능하다는 것을, 가족 같고 친구 같은 여성들이 서로를 보듬어 주는 말들의 풍경 안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사람 냄새가 나는 작품을 쓰고자 했다'고 밝히는 배삼식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역경 속에서 사람을 보듬어 줄 수 있는 것은 함께하는 이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