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은유로서의 네이션’이라는 주제를 통해 미학과 정치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전개하는 책 은유로서의 네이션은 보이지 않는 수면 밑의 네트워크이며 미학적 은유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보인다. 이 책은 그런 미학적 은유가 우리의 존재를 떠받치면서 어떻게 하위정치로서 ‘보이지 않는 저항’이 되는지 알려준다. 또한 그처럼 존재론적으로 발견된 네이션은 처음부터 ‘트랜스내셔널’의 맥락과의 교섭을 통해서만 역동적이 됨을 보여준다. 은유로서의 네이션이란 민족주의나 민족국가와는 달리 보이지 않는 실재계(라캉) 영역의 네트워크이다. 미학은 그런 보이지 않는 것을 은유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지배체제의 표상체계(상징계)를 동요시킨다. 예컨대 식민지 시대의 소설들은 총독부의 권력을 피해 물밑에 형성된 네이션을 은유를 통해 표현했다. 구체적으로 〈만세전〉의 ‘묘지’, 〈고향〉의 ‘아리랑’, 〈낙동강〉의 ‘낙동강 젖꼭지’ 등이 바로 은유로서의 네이션이다. 또한 〈님의 침묵〉의 ‘보내지 않은 님’이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빼앗길 것 같은 봄’ 역시 은유적 네이션의 표현이다. 이 암시적인 이미지들은 단지 네이션을 표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총독부)와 자본을 넘어선 해방된 세상을 은유로 암시하며 우리를 동요시킨다. 문학작품을 통해 표현되는 은유로서의 네이션 은유로서의 네이션이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같은 교의적 이념을 넘어선 식민지 조선인의 존재의 핵심이었다. 이 책은 조직적인 저항이 나타나기 전에 그런 존재론적 저항이 세상을 동요시켰음을 보여준다. 또한 조직적인 사회운동 역시 존재론적 하위정치를 근거로 가능했음을 논의한다. 사회운동과 존재론적인 은유적 정치와의 관계는 의식적 운동과 그것을 떠받치는 무의식적 빙산의 관계와도 같다. 이런 은유적 네이션/정치는 흔히 문학작품을 통해 표현된다. 그렇기에 빈번히 본격적인 근대의 출발점은 은유적인 정치로서 근대문학의 태동과 부합한다. 즉 우리와 동시대적인 근대가 출발한 시점은 은유적 네이션/정치가 시작된 시점과 일치한다. 서구에서는 발자크의 라스티냑이 출현한 시점이 동시대적 근대의 출발점이며, 우리의 경우에는 1920년대 전반에 은유적 네이션을 표현한 문학이 나타난 시점이 그때이다. 은유는 지배권력의 표상체계를 동요시켜 이중적으로 만든다. 그래서 은유적 네이션의 표현은 식민지인이 의식과 무의식, 표상과 비표상, 상징계와 실재계의 이중적 삶을 살았음을 알려준다. 식민지 조선인은 두 겹의 삶 속에서 갈라진 혀로 말을 하면서 양가적이고 혼종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살고 있었다. 따라서 그 같은 은유적 네이션/정치는 이제까지의 근대성의 개념들을 파열시킨다. 지금까지 근대성의 범주들은 경계선을 중심으로 설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해체론처럼 경계를 해체하는 사유들은 탈근대적 사상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 둘을 넘어선 새로운 모험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은유를 통해 표현되는 양가성과 혼종성이다. 이 책은 경계선의 위치에 수많은 주름들과 굴절들이 있으며 그것에 의해 양쪽이 동요하고 진동함을 밝히고 있다. 가령 네이션은 트랜스네이션 없이는 작동되지 않으며 그런 양가적인 진동은 근대와 탈근대, 제국과 식민지, 정치와 미학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트랜스내셔널의 교차로를 통해 메아리치는 은유로서의 네이션을 국가와 자본을 넘어서 바라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은유로서의 네이션이 트랜스내셔널 전망과 연관됨을 보여준다. 근대의 공간은 개별과 보편의 어느 한쪽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의 운동 속에서 전개된다. 그 점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는 경계를 넘어서는 듯하면서 경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반면에 은유로서의 네이션이란 국가와 자본의 경계를 월경하는 움직임이며 그런 운동은 트랜스내셔널의 맥락에서만 가능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개의 운동 ‘사이’에 존재하는 셈이다. 하나는 민족주의/제국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은유로서의 네이션/트랜스내셔널이다. 그 둘은 여기와 저기, 개별과 보편, 작은 것과 큰 것 사이를 움직인다. 그중에서 경계를 넘는 듯하면서 더 넓혀진 경계로 돌아오는 것이 민족주의/제국주의다. 우리는 이를 정치의 미학화라고 부를 수 있다. 반면에 끝없이 경계를 넘어서며 운동하는 것이 은유로서의 네이션/트랜스내셔널이다. 이것이 바로 미학의 정치화다. 그렇기에 은유로서의 네이션은 흔히 트랜스내셔널의 교차로를 통해 메아리친다. 이 책은 그런 역동적 운동의 관계를 국가와 자본을 넘어서는 전망의 방식으로 보았다. 경계선을 전제로 한 민족의 개념을 앞세우면 민족국가들은 결코 해방된 트랜스내셔널한 세계에 이르지 못한다. 반면에 은유적 네이션은 네이션을 버리지 않으면서 평화로운 트랜스내셔널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그런 전망은 특히 세계 체제의 타자의 위치에 있는 네이션들 사이에서 발견된다. 물론 타자의 위치에 있는 네이션들 역시 민족을 앞세울 경우 평화롭게 어우러지기 어렵다. 예컨대 베트남과 네팔과 방글라데시는 민족적으로 쉽게 한국과 조화되기 힘들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 은유적 네이션은 중첩되며 모두가 공감하는 트랜스내셔널한 울림을 얻게 해준다. 가령 <방가방가>라는 영화에서처럼 방글라데시의 노래는 한국과 제3세계 사람들에게 은유적 네이션으로 울리면서 트랜스내셔널한 화합을 암시한다. 또한 《태풍》(최인훈)에서는 주인공 바냐킴의 ‘은유적 네이션’에 대한 사랑이 다중적 정체성 속에서 ‘트랜스내셔널’의 울림을 통해 표현된다. 제3세계와의 연대와 남북연합에 대한 고찰 그 같은 은유로서의 네이션을 매개로 한 트랜스내셔널 연대가 바로 국가와 자본을 넘어선 해방된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마지막으로 제3세계와의 연대와 남북연합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식민지 근대의 세 측면인 식민지, 냉전, 세계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단초를 발견한다. 은유적 네이션과 트랜스내셔널 사이의 운동은, 우리가 경험한 민족주의/제국주의의 딜레마를 넘어서는 길이며, 끝없이 반복되는 식민지 근대에서 벗어나는 전망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