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우리에게 어떤 미술관이 필요한가?
경제 가치에 매여 덜떨어지거나 오락만을 좇게 된
현대 미술관에 큐레토리얼 실천의 대안을 제시하다
오늘날 서구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비평적 활동을 펼치고 있는 비평가이자 미술사학자인 클레어 비숍은 동시대 미술관에서 작동하고 있는 ‘동시대’의 의미를 물으면서, 미술관의 역할을 결정하는 다양한 큐레토리얼 실천들을 분석한다. 미술관이 1989년 사회주의 몰락 이후 글로벌 신자유주의가 펼쳐놓은 글로벌 마켓에서 경험 경제(experience economy)에 가장 잘 부합하는 블루칩으로 부상하면서, ‘큰 것이 좋은 것’ ‘좋은 것은 풍족한 것’이라는 주문이 동시대 미술관의 지배적인 서사로 관통하고 있다. 클레어 비숍은 작은 소책자 「래디컬 뮤지엄」에서 공통재의 아카이브인 미술관에서 이러한 상황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무엇이 래디컬인가?
미술관은 한때 엘리트 문화의 귀족 기관으로 여겨져 일반인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하물며 난해한 현대미술의 처소인 현대미술관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 1989년 이후 현대미술을 대상으로 하는 미술관은 전례 없이 늘어나고 규모 역시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할 만큼 이목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의 디자인이 더해지면서 오늘날 미술관은 무릇 가장 ‘핫’한 혹은 ‘힙’한 곳으로 통하면서 문전성시를 이루는 장면도 흔하게 목격된다. 압도적인 규모의 건축물에서 관객은 “예술에 앞서 먼저 공간에 도취”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스타 건축가들이 지은 세계 유명 건축물의 건축 디자인에 대한 세세한 분석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할 포스터의 「콤플렉스」를 일독할 필요가 있다), “관객들은 작품에 집중하여 고도의 예술적 통찰을 얻는 대신, 여가와 오락을 위한 트렌디한 감성만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어쨌든 동시대의 현대미술관을 찾는 관객 수가 늘어난 것만 보면 이전의 고답적인 미술관과 비교해 가히 ‘래디컬’한 변신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시대의 현대미술관들이 펼치는 이와 같은 전 지구적 파노라마에서 이들을 묶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미지의 층위, 즉 새로운 것, 쿨한 것, 사진 찍기 좋은 것, 잘 디자인된 것, 경제적으로 성공적인 것의 층위에서 동시대성이 상연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비숍은 ‘래디컬’의 본래 의미에서 이와 같은 미술관 문화와는 확연히 다른 미술관 모델을 ‘래디컬 뮤지엄’이라고 부른다. 비숍의 ‘래디컬 뮤지엄’은 더 실험적이면서도 건축의 영향을 덜 받으며, 우리들의 역사적인 순간에 대해 더욱 더 정치적인 참여를 제안하고 있다. 비숍은 이러한 ‘래디컬 뮤지엄’의 사례로 세 곳을 들면 이들의 큐레토리얼 실천을 분석하는데, 그곳은 각각 담배 제조업자인 헨리 반아베의 소장품을 토대로 설립된 네덜란드의 반아베 미술관, 스페인의 국립미술관 레이나소피아 미술관, 그리고 극심한 재정난 속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를 선보이고 있는 류블랴나의 메탈코바 동시대 미술관이다. 각각 기업가, 여왕, 군사기지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 세 미술관들은 큐레토리얼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소장품에 기반해 역사, 입장, 임무에 대한 확고한 관심을 견지하고 있는 곳으로, 모두 미래를 주시하면서도 현재에 대한 진단으로 과거를 서술하기 위해 우리의 가치를 반영하고 논의하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2000년대 말에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는 ‘긴축재정’이라는 명목으로 문화예술에 대한 공공기금을 축소하면서 문화를 경제 가치에 예속시키는 현상을 더욱 고착화하고 있다. 비단 문화예술에만 국한되지 않고, 교육, 인문학 등 사회 제반 영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지배적인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불행하게도, 그리고 절망적이지만 대안적인 가치 시스템을 고안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문화예술 영역에서의 “복잡하고, 창의적이고, 상처받기 쉽고, 지적이고, 도전적이고 비판적인” 모든 것은 현재를 훌쩍 넘어서는 넓은 시간대에서 느리게 작동한다는 점 때문에 사용 가치와 회계에 입각한 계량화된 지표(보조금 수익 예산, 경제 효과, 영향력 측정 등등)의 압박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래디컬 뮤지엄」에서 비숍은 이 같은 동시성의 결여가 오히려 ‘동시대(성)’의 개념에 대한 재사유를 요구하고 있다고 본다. 현재의 가시적인 측면에서만 볼 때 그 어느 곳보다 ‘핫’하고 ‘힙’한 동시대성을 넘어서는 문화적 가치를 분명하게 말해야 하는 임무야 말로 동시대 미술관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하고, 미술관을 능동적이고 역사적인 행위자로 다시 상상하게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