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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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개정판 출간과 그 의의 1980년대 초중반 수많은 청년을 가슴 뛰게 했던 ‘공산주의운동’이라는 주제는 1980년대 말 동구 현실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1991년 소비에트연방의 해제 이후 급속히 그 관심과 활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지금도 분단 상황이 지속되고 있고 북한 정권이 실재하는 한 이 주제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통합진보당이 해산되고 5명의 국회의원이 의원직을 잃게 된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이후 이 주제는 다시금 대중의 관심 영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1973년 초 미국에서 출간된 로버트 스칼라피노와 이정식 교수의 공저 Communism in Korea를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한홍구 교수가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한국 공산주의운동사』(초판 전 3권)는 오랫동안 큰 도서관 혹은 헌책방을 통해서나 접할 수 있었던 이 분야의 고전이었다. 운동 편과 사회 편 두 권으로 된 총 1,532쪽의 방대한 원서 중 1986~1987년에 운동 편만 번역해 세 권짜리로 냈던 것을 근 30여 년 만에 합본 개정판으로 새로 단장해 선보이게 되었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세월의 흐름을 감안해 북한 쪽 자료를 접하기 어려웠던 초판 출간 당시에는 의미가 있었으나 이제는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어진 90여 쪽의 북한 관련 자료는 수록하지 않은 대신 ‘21세기의 북한’이라는 주제로 이정식 교수의 새로운 분석을 추가했으며 이 분야 연구자들을 위해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 전반의 흐름을 논한 이정식-한홍구 교수의 특별대담 ‘이정식이 걸어온 학문의 길’을 부록으로 실어 그 의의를 더했다. 또한 초판에는 수록되지 않았던 중요 도판 다수를 추가해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역사를 모르면 아무것도 제대로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책을 번역하는 데 3년이라는 공을 들인 한홍구 교수는 이 책의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 다소 반공적이고, 1970년대 이후 이북이 겪은 역사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근 100년에 이르는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전체를 아우르는 책으로는 아직도 이 책을 능가하는 것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공산주의운동사나 이북 현대사의 특정 시기나 특정 주제에 대해서는 뛰어난 연구 성과가 상당히 나왔지만, 이 책처럼 일관성을 갖고 큰 흐름을 설명하는 책은 서구 학계에서도 한국 학계에서도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진보운동은 지배세력으로부터 늘 극심한 탄압과 경계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권위적인 독재체제의 으뜸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반공주의’였다. 3대 세습을 강고히 하고 자기들 말로 주체의 혁명 전통을 중시하는 북한을 우리가 함께 손잡고 일으켜야 할 형제이자 통일의 파트너로 보느냐 흡수 통일해야 할 주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우리 미래 세대의 운명이 달린 만큼 지나온 우리 역사부터 바로 보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진보운동의 전열을 가다듬고 향후 더욱 장기적이며 치밀한 전략을 구축하기 위해서라도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흐름과 한계를 함께 인식할 필요가 있다. ▶ 뜨거운 민족주의운동으로 시작된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일제가 극심한 무단통치를 시행하던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은 국내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줄 수 없었던 반면, 동부 시베리아와 만주에 산재해 있던 많은 한인韓人이주자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도록 했다. 물론 그들 모두가 독립운동가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 가운데는 열정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시베리아에서 동맹군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볼셰비키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다. 일본으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을 받았던 러시아인들이 보기에 최근 나라를 빼앗긴 쓰라린 아픔을 겪은 한국인보다 더 적극적으로 일본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당이 한국의 뜨거운 민족주의를 이용해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동원함에 따라 사상 처음으로 붉은 깃발 아래 움직이는 한국의 정치운동이 출현했다. 따라서 초기 한국의 공산주의운동은 자연스럽게 민족주의운동에 일체화된 것으로, 공산주의운동에서 순수한 민족주의 요소들을 제거해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산주의는 식민지 민족의 해방을 약속하는 운동으로서 극동에 출현했고, 이것만으로도 수많은 애국자를 감동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은 한낱 약속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자금, 무기, 기술적 지원 등 물질적 원조도 제공했다. 그들은 나라를 빼앗긴 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세계에 내동댕이쳐진 인민들과 동맹을 맺었다. 더구나 공산주의는 식민지 해방을 넘어선 그 무엇, 즉 인간의 해방을 약속했다. 공산주의는 극적인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열망을 충족시켰고 상당수의 한국인, 특히 소지식인 출신들이 바로 이 같은 범주에 속했다.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주동 세력을 볼 때, 그들은 다른 정치적 통로를 통해 이루어지던 정치적 근대화를 이룩한 세력이나 민족주의운동의 지도 세력과 동일한 유형의 사람들이었다.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초기 지도자들은 전체 한국 인구의 5퍼센트도 안 되는 좀더 ‘서구화’된 고등교육을 받은 상층 출신이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목표는 당시 한국 사회의 가치관에 비춰볼 때 매우 급진적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민족주의의 발전과 평등이었다. 이들이 활용한 수단에는 첫째 후견제後見制에 대한 의존, 둘째 개인을 집단의 엄격한 규율에 종속시키는 위계질서가 강력하게 잡힌 조직구조의 발달, 셋째 이성과 신념뿐 아니라 권위에 대한 복종에 의존하는 이데올로기 체계 등이 포함되었는데, 이들 방법은 전통적인 것이었다. ▶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약점과 한계 * 인적, 지역적 한계 이러한 급진적 지식인 혹은 소지식인들은 한국 사회 내의 어떤 사회경제적 집단과 가장 성공적으로 접촉할 수 있었을까? 도시노동자계급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 전체 인구의 7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층만이 그 당연하고도 절실한 대상이었다. 이는 농민들의 불만 때문만은 아니었다(실제로 농민층의 요구를 이해하고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받은 층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농민층이 중요했던 이유는 농민이 전통적인 조직구조를 거의 완전히 유지하고 있었으며, 더욱 중요하게도 농민층은 공산주의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정치적 행동력을 지니고 있었다. 급진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전통적 수단을 활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공산주의자들에게 농민은 바로 가장 좋은 접촉대상 또는 목표였다. 한국 공산주의자들이 어느 지역보다도 만주-한국 국경지대의 간도와 함경남도의 농민층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많은 활동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들 지역은 중앙의 통제력이 잘 미치지 않는 변경지대였고, 따라서 불평분자나 범죄자 혹은 다른 종류의 독립적인 인간들이 모여들 수 있는 지역이었을 뿐 아니라 정부에 대한 농민층의 반항이 전통적으로 강했고 정부가 이에 대처할 수단을 거의 갖고 있지 못한 지역이었다. 민족주의나 농업개혁 등 매력적인 문제들을 들고 나오는 것은 공산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활발히 이용한 농민층의 불만은 지방적이고 특수한 것이 많았다. 사실상 공산주의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의 동기에서 이성적理性的인 요소가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느냐 하는 데는 문제가 많다. 1930년대 말을 포함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자료들은 민족주의나 경제적 개혁이 이들이 공산주의운동에 투신하게 된 중요한 동기였음을 보여주지만, 그와 동시에 친구와 친척, 동료들의 호소 역시 적어도 이와 동등한 정도로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한국 정치의 본질적인 군집성은 다른 정치운동에 대한 투신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투신에서도 그 모습을 나타냈다. * 극도의 의존성과 파벌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