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마티의 온(on) 시리즈에 대하여
○○○에 대해 생각하고 쓰다
○○○에 대해 관찰하고 생각하고 쓰다
○○○에 대해 주저하면서도 열려 있는 상태로 관찰하고 생각하고 쓰다
○○○에 대해 주저하면서도 열려 있는 상태로 다시 사유의 가능성을 찾아 관찰하고 생각하고 쓰다
온(on) 시리즈, 첫 번째 『스페이스 (논)픽션』
소설가 정지돈이 건축 전공자라고 넘겨짚는 이들이 제법 있다. 2015년 그의 등단작인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모더니즘 건축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 중 하나고, 이 소설 속 등장인물인 건축가 이구는 한국 건축역사에 밝은 이가 아니면 알기 힘든 이름이었다. 또 그가 쓴 소설의 윤곽은 대체로 공간에 의해 드러난다. 도시 또는 비도시, 골목 또는 대로, 낡은 건축물과 습하거나 어둑한 3층 등. 그의 공간은 수시로 기억 또는 시간의 이동과 연관되며 기억의 가지마다 사건과 인물이 얽혀든다. 『내가 싸우듯이』의 한 장면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의 스토리를,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첫 문장이 순식간에 떠오르는 독자들이 있을 테다. 꽤 오래 건축을 탐하고 즐겨온 탓 혹은 덕에 어느 샌가 건축 비평서에 글을 청탁받게 되었는데, 2018년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초청되어 글을 쓰고 낭독회를 갖은 후로 그는 건축계에 일이 생기면 초청되는 주요 작가가 되었다. 건축 전문잡지 『스페이스』가 소설가의 에세이를 잡지의 첫머리에 배치한 것은 1966년 창간 이래로 처음이었다고 하는데, 정지돈의 애독자와 건축계의 이슈 사이에 서로 닿는 지점들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일 것이다.
총 3부로 이루어지는 구성 중 1부 ‘스페이스’는 ‘공간은 어떻게 정의될까’로 시작한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을 상대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가장 최신의 물리학 이론들, 이를테면 고리양자중력이론은 공간을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 공간은 존재하는 것들을 제외하면 아무 의미도 없다. 공간은 입자들의 관계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란 없으며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경계 역시 없다. (⋯)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간은 상호작용의 범위”다. 말하자면, 공간은 그곳을 채우는 관계들이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는 뜻. 그렇다면 영화관, 미술관, 극장 등 익명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전유하는 공적 공간이라면, 그런 곳들도 공간의 다른 가능성이란 것이 가능할까?
“인체공학적으로 만들어진 멀티플렉스의 푹신한 좌석에 앉아 콜라를 한 모금 마시면 평온함에서 비롯한 한숨이 나온다. 영화가 시작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든다… 잠에서 깬 후에는 화장실에 다녀온다. 이쯤이면 러닝타임이 한 시간 정도 남는다. 중간 중간에 핸드폰을 보며 영화가 끝나길 기다린다. 영화가 끝나면 텅 빈 거리를 천천히 거닐며 집으로 돌아온다. 포털에서 영화에 대한 리뷰를 찾아보기도 한다. 이 영화 안 본 눈 삽니다(별 하나). 쯧쯧… 그러게 뭐하러 봤어(혼자 중얼거리는 나). 나의 영화 감상기를 들은 친구 역시 같은 말을 한다. 쯧쯧… 그러게 뭐하러 봤어. 나는 대답한다. 콜라 마시려고. 콜라는 집에서 마셔도 되잖아? 음… 좀 걷고 싶어서. 그냥 산책하면 되잖아. 음… 잠깐 자고 싶어서? 그것도 집에서… 잠깐만, 너 대체 극장은 왜 가는 거야?”
코웃음이 나는 에피소드를 통해 작가는 공적 공간에 대한 담론을 유쾌하게 비튼다. 극장, 미술관 등에 대한 담론 가운데 공간에 대한 담론은 없다는 것. 모두 작품이 재현되는 방식, 작품이 경험되는 방식에 대한 것이지 공간을 둘러싼 맥락은 담론화되지 않는다는 것. 작가는 “내게 화이트 큐브는 거리의 거실이었고 블랙박스는 거리의 침실이었다. 작품을 뒤로 밀어놓을 때 비로써 공간의 다른 가능성이 열린다”며 비공식적인 공공생활의 즐거움을 고백하는데, 이런 공간들을 이용할 때 불합리한 상황을 통해 공간의 우연적인 성격을 드러내 평면적인 기능과 요구로부터 분리 또는 재탄생시킬 수 있다면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제안한다.
작가는 서문에서 “나는 건축의 문외한이지만 도시의 거주민으로서, 한국의 아파트나 주택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전문가다. 건축가도 건축주도 아니지만 사용자로서는 누구 못지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책을 읽는 사람 누구나 마찬가지다”라고 쓴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 온, 들어 온, 읽어 온 건축, 도시, 공간 이야기는 모두 그것을 짓거나 짓도록 하거나 혹은 짓는 과정을 속속들이 아는 비평가 또는 학자들의 이야기였다. “사용자가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작가는 꼬집는다.
그렇다고 정지돈이 꺼내는 공간이야기가 비단 사용자의 경험에 머물지는 않는다. 그는 공간과 도시, 공간과 기억, 공간과 역사, 공간과 테크놀로지, 공간과 자본, 그리고 동시대 예술의 풍경까지를 훑으며 독자들을 야릇한 고민과 코믹의 세계로 지구 중력처럼 강력하게 끌어당긴다. 예의 그렇듯 무수한 클립들이 그 자장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히토 슈타이얼의 『면세 미술』을 포함한 현대예술을 둘러싼 통찰들,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영화, 퀑탱 메이야수의 비평, 유령처럼 떠도는 리미널 스페이스, “역사는 대기실”이라고 명명한 크라카우어, 역사적이면서 불명예이기도 했던 르 코르뷔지에의 문다네움 어페어 사건, 아즈마 히로키의 문제적이면서 유의미한 제안. 이뿐인가! 대구, 부산, 경기도를 찍고 서울까지, 아파트와 아파트 단지들, 출퇴근과 이동, 기차와 비행기, 전철과 버스를 둘러싼 작가의 감상은 온갖 영화와 책, 공연 예술과 이슈들과 연결되어 뭔가를 더 찾도록 만드는, 독특한 2차 행동을 끝없이 유발하고 만다. 책을 읽으며 검색창을 놓지 못하게 하고 끝없이 서점의 장바구니를 들추게 만든다.
책의 말미에는 「코멘터리」가 붙었다. 특히 3부에 등장하는 두 편의 소설에서 도시와 건축이 테크놀로지와 시각성을 어떻게 매개로 삼는지에 관한 작가의 상상력이 팽팽하게 확장된다.
『스페이스 (논)픽션』은 책 안으로 빠져드는 읽기보다 끝없이 책 밖으로 나가게 이끈다. 작가가 풀어놓는 생각들은 2차, 3차의 행동을 야기한다. 독자는 검색창을 열거나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거나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지만 알고 나면 분명 매력적일 듯한 작가가 언급한 온갖 콘텐츠를 찾아 리미널 스페이스의 한 장면에 빠져들 듯 끝없이 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는 “해석은 언제나 또 다른 해석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공간 사용자로서 독자들 모두가 자신만의 경험을,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이 책의 효용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