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법치국가 조선에서 …… 법으로 처단할 수 없는 살인, 법으로 구제할 수 없는 살인은 어떻게 일어나고 처리되었을까? 《역사로 남은 조선의 살인과 재판》 - 『심리록』으로 읽는 조선시대의 과학수사와 재판 이야기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만나는 조선의 법 정신 ‘법치국가’라는 단어에 절로 고개가 저어질 만큼 혼탁한 2013년 12월 대한민국. 거짓 구호가 아니라 진정으로 진정한 원칙과 정의의 시대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우리는 오히려 고전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의 소란으로부터 잠시 등 돌리고 옛 선인의 지혜를 온고지신으로 삼는 것이 오히려 바른 길일지 모르겠다. 한 점 기울지 않은 철저한 공명의 법 정신으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운 지도자로 조선의 22대 임금 정조를 꼽으면 어떨까. 정조의 활약상, 그 중에서도 사법 재판에서의 진귀한 일화들을 쉬운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낸 인문역사서가 출간되었다. 《역사로 남은 조선의 살인과 재판》(이번영 지음, 도서출판 이른아침) 조선을 뒤흔든 18가지 해괴하고 복잡한 살인사건과, 사법정의 구현을 위해 노력한 정조의 과학수사와 재판 이야기 모음이다. 같은 서류를 10번씩이나 반복해서 검토한 정조 동방예의지국 조선시대에도 대략 5일에 1건 꼴로 살인 등 중범죄가 발생했다. 이들 중범죄에 대해서는 임금의 판결이 꼭 필요했고 그래서 정조는 평균 5일에 1번꼴로 살인사건 등의 중범죄에 대한 최종심을 진행해야 했다. 통계에 따르면 정조는 한 사건당 평균 2.4회의 중간 및 최종 판부判付(왕의 판결문)를 내렸다. 대략 2일에 1번꼴로 중범죄에 대한 중간 심리와 판결을 진행한 셈이다. 정조는 필요할 경우 사건과 관련된 일체의 서류들을 모두 꼼꼼히 챙겨 읽었고, 하나의 판결을 위해 밤을 새워가며 같은 서류를 무려 10번씩이나 반복해서 검토할 정도로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범죄와 법에 관심이 컸던 정조는 《증수무원록언해》와 《증수무원록대전》을 편찬했는데, 두 책 모두 피살자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을 분석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다룬 전문 법의학서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시체의 변화, 사인死因 규명, 검시檢屍 절차, 검시 결과 보고서인 검안檢案의 서식 등을 다루어 관리들이 반드시 참고하고 활용하도록 하였다. 또 사망의 원인을 익사, 구타, 중독, 질병 등 모두 22가지로 대별하고, 각각의 항목 아래에 더욱 자세한 원인별 증상을 실었다. 아울러 정조는 자신이 관여한 모든 중범죄 소송에 대하여 그 과정과 결과, 판단의 근거 등을 일일이 기록으로 남겼고, 나중에 이를 묶어 종합적인 형사소송 판례집을 편찬토록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책 《심리록》은 정조가 세손으로 있으면서 대리청정을 하던 1775년(영조 51)부터 1799년까지의 중범죄 관련 형사소송 1,850여 건을 싣고 있다. 《심리록》 속 살인의 진풍경들 《심리록》은 조선시대의 살인을 비롯한 중범죄 사건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났는지 자세히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파격적이고 기괴한 사건들 또한 적지 않다. 시댁식구는 물론 친정오라비까지 합세하여 청상과부를 산 채로 물에 빠뜨려 죽인 사건, 좀도둑으로 몰린 일가족 일곱 명이 서로의 몸을 하나로 묶고 동시에 호수에 투신한 일가족 집단 자살사건, 새댁이 시어머니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시집살이 3개월 만에 스스로의 목에 칼을 세 번이나 찌르고 자살한 의문의 사건, 외간남자에게 팔목을 잡힌 여인이 스스로 자신의 팔을 작두로 잘라버린 사건, 자신의 정절과 관련된 헛소문을 퍼뜨린 노파를 18번이나 부엌칼로 찔러 살해한 젊은 여인의 한 맺힌 살인사건, 전처를 불에 달군 인두와 호미 등으로 고문하여 죽게 한 조선판 사이코패스 살인사건, 밥 한 그릇 때문에 아내를 살해했다고 소문이 나서 고발된 남자의 억울한 사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상대를 칼로 살해한 후 그 간을 씹고 창자를 꺼내어 몸에 두른 엽기적인 사건 등이 그러한 예다. 《심리록》에 실린 여러 사건들에의 소문들은 조선 팔도에 빠르게 전파되어 수많은 백성들에게 공분과 적개심을 불러일으켰고, 때로는 뜨거운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동정심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이토록 파장이 큰 사건들임을 잘 알기에 정조는 더욱 냉정하게 판단하였고, 백성들의 교화에 어떤 도움이 될 것인지 하는 문제까지 두루 고민하여 최종 판결을 내렸다. 법치국가 조선의 과학수사와 형사재판 조선은 엄연한 법치국가였으며 형사사건에 따르는 일체의 수사와 소송이 법률에 근거해야 했다. 예를 들어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반드시 검시의 과정을 거쳐야 했고, 피해자 가족이나 친인척은 물론 모든 관계인들의 증언을 들어야 했다. 물증을 확보하는 것은 기본이고 범인 자신의 자백까지 받아야 했으며, 이런 모든 정황과 물증과 진술과 자백이 일치하지 않으면 소송은 마무리될 수 없었다. 게다가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기초 수사의 과정은 반드시 서로 다른 관리가 맡아서 2회 이상 실시하도록 했고, 이 이중의 수사 결과가 서로 일치되지 않거나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있을 경우 수사는 3회든 4회든 한정 없이 반복되었다. 과하게까지 느껴지는 이런 절차는 진실과 거짓을 명백하게 밝혀내기 위한, 어떤 경우에도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애민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조선 정조의 사법부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수사기법을 총동원하여 수사를 진행하였다. 그 기법들을 망라하여 누구나 알기 쉽도록 해설을 덧붙여 전국에 배포한 법의학서가 앞에서 예를 든 《증수무원록언해》 등이다. 검시에는 검시 전문가라 할 오작인과 의사 등이 반드시 참여함으로써 정확성을 높였고, 각종 도구와 장비와 화학적 검사법들이 총동원되었다. 정조의 사법부는 이 같은 과학적 지식들을 활용, 자살로 꾸며진 타살사건을 해결하고 끝까지 자기의 죄를 부인하는 범죄자들을 궁지로 몰아가는 활약을 펼치곤 했다. 이 과정을 읽기 쉽게 풀어낸 《역사로 남은 조선의 살인과 재판》 속 이야기들은 독자들에게 추리 소설을 읽는 흥미와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것이다. 조선판 검사실명제 살인 등 소송을 진행하고 판결하면서, 정조는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안일주의’를 가장 경계했다. 명민하고 학구적인 임금답게 그는 철저하고 완벽한 판결을 원했다. 그 자신이 각 고을과 감영과 형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문서들을 철저하게 검토했고, 털끝만큼이라도 앞뒤가 맞지 않거나 공소장의 내용이 허술할 경우 반드시 재조사를 명했다. 기존의 관리나 판관들의 수사로는 해결의 가망이 없다고 판단될 때면 특임검사에 해당하는 어사 파견을 주저하지 않았고, 수사를 태만히 하거나 판단착오를 일으킨 관리들은 엄중 문책했다. 고의에 의한 것이든 무능에 의한 것이든, 정조에게 ‘사법살인은 용서될 수 없는 것’이었다. 사건 초기에 수사를 부실하게 한 것이 밝혀진 목민관이나 관리들은 반드시 문책을 받을 정도로 당시의 수사는 철저하고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스스로 하늘에 한 점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판단될 때에만 최종 판결을 내렸다. 이런 엄정한 소송과 판결을 위해 정조는 모든 소송의 과정을 기록하게 했고, 수사에 참여한 사람과 소송에 참여한 사람은 물론 간단한 의견을 낸 대신들의 이름까지 상세히 기록하게 했다. 말하자면 이미 검사실명제가 도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관리들은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수사와 소송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의심할 것이 없는 곳에서 의심을 일으키라!” 정조는 판부를 내릴 때마다 ‘무의처기의無疑處起疑(더는 의심할 것이 없다고 판단되는 상태에서도 다시 한 번 의심을 일으키라)’를 강조했다. 정황과 증언과 증거와 자백이 아무 명백하다고 해도, 정말로 단 한 점의 모순도 없는지 거듭 숙고해야 한다는 의미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판단이어서 그랬고, 한 번 실수하면 되돌릴 수 없는 판단이어서 그랬다. 《역사로 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