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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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고 곯아졌을지언정, 뜯기고 짓밟혔을지언정, 그의 가슴에도 사랑은 있으리라.” 리얼리즘의 개척자 현진건의 단편소설을 모두 만나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문학에 관심 없는 사람도 익히 알고 있을 명대사로 유명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준다. 현진건 단편집 『운수 좋은 날』은 ‘단편소설의 대가’ 현진건의 작품이 지닌 맛을 한껏 즐길 수 있도록 그가 발표한 단편 전부와 중편 「타락자」를 함께 수록했다. 올해는 현진건 탄생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강점기 활동한 현진건은 거대 담론 대신 개인의 삶에 돋보기를 갖다 댔다. 일제에 의해 금서 처분을 받았던 그의 단편집 제목이 ‘조선의 얼굴’이었듯 당시 생활상을 생생하게 담아낸 개개인의 이야기는 곧 민족과 시대의 현실이었다. 그는 ‘생활(生活)’이란 단어의 무게를 아는 소설가였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언론인이었다. 동아일보 사회부장 시절,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하고 보도한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던 그는 빈궁한 삶에도 일제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삶과 문학에 있어 철저한 리얼리스트였던 현진건의 다음 말은 그의 소설을 감상하며 되새길 만하다. “오늘날의 우리는 오늘날의 우리 인생에게 가장 귀한 것을 만들어 낼 일이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 - 이날 이때에, 자기가 서 있는 제 땅을 할 수 있는 대로 힘 있게 밟아서 깊고 굵직한 족적을 남길 따름이다.” “가난한 이의 사랑은 종교다, 신앙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위대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냐.” 식민지 조선의 현실, 지식인과 민중의 내면을 아로새기다 현진건의 단편이 중점적으로 담고 있는 것은 가난이다. 현진건이라는 이름을 문단에 알린 「빈처」는 자전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는데, 두 살 연상의 아내와 이른 결혼을 한 뒤 유학했다 돌아와 밥벌이를 못하는 소설 속 남편은 실제 그의 삶과 겹친다. 보수 없는 독서와 가치 없는 창작에 몰두하며 돈은 벌지 못하는 남편을 대신해, 세간과 의복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건 아내이다. 「운수 좋은 날」의 남편은 어떤가. 병든 아내를 두고 거리로 나온 인력거꾼 김 첨지는 오늘은 나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던 아내의 울 듯한 얼굴이 떠오르지만, 계속되는 행운을 놓칠 수 없어 일을 계속한다. 「고향」은 일본에 농토를 빼앗기고 타향살이를 하며 부모까지 잃고 마는 농민의 피폐한 삶을, 「신문지와 철창」과 「서투른 도적」은 손주를 위해 먹을 것을 훔치는 노인의 절절한 마음을 그려냈다. 빈곤은 사람의 정신까지 물어뜯는 법이다. 「사립정신병원장」의 W는 언제든지 싱글싱글 웃던 낙천가였다. 그는 정신이상이 된 친구의 말벗 노릇으로 돈을 벌어서 ‘사립정신병원장’이란 별명을 얻은 터. 궁핍한 현실은 이 낙천가의 성격에도 그늘을 드리운다. 굶주리고 있을 처자식 생각에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술자리의 남은 음식을 챙기던 그가, 아들 이름을 부르며 목 놓아 울다 말고 내뱉는 말은 섬뜩하다. “여보게, 칼로 푹 찔러 죽이는 것이 어떻겠나? 아니, 그럴 일이 아니다. 고 어린것을 칼로 찌를 거야 있나? 차라리 목을 눌러 죽이지. 목을 누르면 내 손아귀 밑에서 파득파득 하겠지.”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게 어떻겠냐는 비정한 아비, 그 아들의 이름이 ‘복돌이’라는 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가난한 이에게 “원수 같은 돈”과 “그 잘난 밥”이 얼마나 무겁게 삶을 짓누르는지 현진건은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소설이 어두운 현실의 비극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그의 소설에는 캄캄한 밤이 지나고 만나게 되는 환한 햇살 같은 사랑과 연애가 있다. 데뷔작 「희생화」는 사랑을 떠나서는 행복이 없다고 말하는 ‘누나’의 첫사랑을 남동생의 시선으로 보여주고, 「피아노」의 부부는 “독서ㆍ정담ㆍ화투ㆍ키스ㆍ포옹이 그들의 일과”이다. 그의 소설들은 당시 자유연애가 확산되는 현실을 흥미롭게 담아내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B사감과 러브레터」이다. “사내란 믿지 못할 것, 우리 여성을 잡아먹으려는 마귀인 것, 연애가 자유이니 신성이니 하는 것도 모두 악마가 지어낸 소리”라고 하던 B사감이 학생들의 연애편지를 몰래 읽는 모습은 웃기면서도 애잔하다. B사감과 비슷한 캐릭터로 「까막잡기」의 ‘학수’가 있다. 여자라면 어여쁜 미인이었을 미남 상춘과 달리 오래된 전쟁터와 같은 얼굴을 지닌 추남 학수. 그는 여학생 구경 가자는 상춘의 꼬드김에 “여학생은 보아 쓸데가 무엇이란 말인가?” 했지만, 막상 음악회에서 여학생을 접한 뒤에는 웃음 가득한 얼굴이 된다. 돈 없이 살기 힘든 도시, 주정꾼 노릇밖에 할 수 없는 사회, 그럼에도 사랑과 낭만이 있는 사람들… 현진건의 펜끝은 식민지 조선의 삶과 문화를 아로새겼다. 이 책은 지금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말 어휘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예를 들면 “가난한 집 자식 같으면 땅김을 벌써 맡았으련마는, 다행히 수천석꾼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덕에 삼과 녹용의 힘이 그의 끊어지려는 목숨을 간신히 부지해 왔었다.”(「사립정신병원장」) 같은 문장에서 ‘땅김(땅에서 올라오는 수증기)을 맡다’는 ‘죽다’를 의미함을 각주로 밝히는 식이다. 덕분에 “나는 부드럽게 그를 위로하였다. 이 말은 결코 곁을 바르는 말이 아니었다.”(「타락자」)의 ‘곁을 바르다(곁에서 비위를 맞추다)’나 “쓸쓸한 고독살이도 얼마나 젊은 그를 괴롭게 하였으랴.”(「연애의 청산」)의 ‘고독살이(고독하게 사는 일)’ 등 새로운 어휘를 접하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정직한 시선과 탁월한 문장으로 삶의 애환과 낭만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현진건의 작품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지금 여기의 우리 마음에도 깊은 감동을 전할 것이다.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의 우주 ‘대한민국 스토리DNA’ 스물여섯 번째 책 ‘대한민국 스토리DNA 100선’. 새움출판사가 야심차게 펴내고 있는 이 선집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첫째는, 이야기성이 강한 소설을 골라 펴냈다는 점이다. 둘째는, 드라마 영화 만화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의 원형(DNA)이 되는 작품 위주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야기성에 주목해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의 삶의 내력을 오롯이 껴안고 있으면서도 우리나라의 정신사를 면면히 이어가고 있는 작품들을 꼼꼼하게 챙기고 골랐다. 옛날 민담에서부터 현대소설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그 가운데 스토리가 풍부하고 뚜렷한 작품을 선정해 과거와 현재, 신화와 역사가 공존하면서 서로 대화하는 형식으로 100권을 채워 나가고 있는 중이다. 오늘날 모든 역사 드라마와 영화의 원형이 된 이광수 장편소설 『단종애사』, 도시 빈민들의 뒷골목을 생생하게 조명한 80년대 베스트셀러 『어둠의 자식들』, ‘첫사랑’과 ‘없는 자의 슬픔’을 주제로 한 단편집 『소나기』, 한국 대표 문학상들의 시작점이 된 주인공들의 탁월한 작품들을 모은 『무진기행』, 카프문학의 흐름을 보여주는 20편을 담은 『탈출기』 등에 이어서 스물여섯 번째로 출간되었다. 대한민국 스토리DNA는 이후에도 국문학자나 비평가에 의한 선집이 아니라, 문학을 사랑하는 대중의 선호도를 우선적으로 반영하여 새로운 한국문학사를 구성해 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