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섬세하고 깊이있는 문장으로 그려내며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신예작가 조해진의 두번째 장편소설 『로기완을 만났다』가 출간되었다. 이 작품이 눈에 띄는 것은 탈북인 로기완과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작가 ‘나’의 이야기가 벨기에 브뤼쎌의 생생한 풍경을 배경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벨기에로 가라, 그리고…… 살아남아라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
이니셜 L, ‘로기완’은 함경북도 온성 제7작업반에서 태어나 자랐고 생존을 위해 홀로 이역만리 벨기에로 밀입국한 스무살 청년이다. 함께 북한 국경을 넘은 어머니가 중국에서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 곧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이었음을 알고, 어머니의 시체를 팔아 마련한 푼돈 650유로를 목숨처럼 품에 안고 브뤼쎌에 온다. 그가 조국과 언어를 상실한 곳에서 감내해야만 했던 가난과 멸시는 소설 곳곳에 가슴 저리게 그려진다.
오후에 이곳으로 돌아와 로가 처음 한 일은 수돗물을 마시는 것이었다. 목까지 물이 차올랐다는 느낌이 들면 로는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저녁에는 더이상 산책을 나가지 않았다. 그저 어둠속에서만 겨우 생존하는, 즐겁고 신나고 설레는 감각 같은 것은 모두 퇴화된 불우한 생명체처럼, 매순간 목숨을 걸고 살아남아야 했던 과도한 생존에의 욕구를 잠시 비웃기도 하면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무의식 저편으로부터 끊임없이 불안한 잠을 불러들였을 뿐이다. (105면)
로기완을 통해 드러나는 북한 주민과 탈북인들의 현실은 무척 쓰리게 다가온다. 작가의 다각적인 취재과정을 거쳐 더욱 실감있게 그려진 이러한 장면들은, 이 작품이 분단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 않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분단체제의 비극성과 현시기 더욱 간극이 커진 남북관계가 초래하는 제반 문제들을 환기시킨다. 아울러 북한 주민을 다룬 여러 장르의 작품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묘사의 유혹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작가의 절제된 서술이 이 환기의 효과를 배가한다.
연길에서 신분이 보장되지 않는 젊은 남자가 일을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젊은 남자란 공안의 눈에 쉽게 띄게 마련이었고 공안에게 걸리면 그후의 일은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영역이 되어버린다. 간혹 불법 벌목장이나 공사장 같은 곳을 찾아가긴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키가 작고 몸이 약했던 로는 감독관 사무실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고는 힘없이 돌아서야 했다. 로는 외가 쪽 친척이 어렵게 마련해준 그늘진 골방에 앉아 고향에서 가져온 책들과 한인 교회 사람들이 기부한 중국어 교재를 건성으로 읽으면서 분주하게 출퇴근을 반복하는 어머니를 지켜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좀처럼 오지 않는 일할 기회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자신의 왜소한 몸과 언제나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정신을 혐오하는 것, 로의 열아홉살과 스무살은 그렇게 소모됐다. (42면)
브뤼쎌로 떠난 여자 - 무엇을 위해 쓰는가
소설은 로기완이 아닌 화자 ‘나’를 통해 서술된다. ‘나’는 불우한 이웃들의 사연을 다큐로 만들어 실시간 ARS를 통해 후원을 받는 방송 프로그램의 작가이다. 그녀는 이 프로의 출연자 중 한 명인 여고생 ‘윤주’와 깊은 인간적 관계를 맺는다. 부모를 여의고 반지하방에서 뺨에 커다란 혹을 단 채 힘겹게 살아가는 윤주의 후원금을 늘리기 위해 ‘나’는 윤주의 사연이 방송될 날짜를 추석연휴로 미룬다. 그러나 이 호의어린 결정은 뜻하지 않게 수술 날짜가 미뤄진 사이에 혹이 악성 종양으로 바뀌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신의 연민으로 희망을 품게 된 윤주가 오히려 더욱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사실에 ‘나’는 너무나 큰 죄책감이 든 나머지 그길로 윤주에게서, 그리고 서로 조금씩 애틋한 감정을 키워가던 PD ‘재이’에게서 등을 돌린다. 현실과 마주할 용기를 잃어버린 ‘나’는 우연히 읽게 된 시사잡지에서 탈북자 로기완의 이야기를 접하고 무작정 벨기에로 떠난다. 그곳에서 ‘나’는, 이제는 벨기에를 떠난 로가 지난 3년간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 일기를 구해 그의 자취를 하나하나 되밟아나간다. 로기완에 대한 글을 씀으로써 잃어버린 삶에의 이유를 찾기 위해, 혹은 글을 쓰는 것이 진정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다시 모색하기 위해. 요컨대 이 소설은 로기완의 ‘고난의 행군’에 대한 절절한 기록인 동시에 작가로서의 삶을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나’의 구도의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박이 빌려준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슈트케이스를 현관 앞에 세워두고는 그대로 거실 창가에 놓인 책상 앞에 앉는다. 가방에서 로의 일기를 꺼내 이번만큼은 행간의 의미,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백까지 꿰뚫는 독서를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섣불리 연민하지 않기 위하여, 텍스트 외부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내부로 스며들어가 스스로에 대한 가혹한 고통과 뒤섞인 진짜 연민이란 감정을 느껴보기 위해서. 나는 재이뿐 아니라 나 역시 틀렸다는 것을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57면)
로기완과 ‘나’가 이국에서 느껴야 했던 고독과 생경한 감각들은 작품을 읽다보면 쉽게 공감이 간다. 이는 작가가 벨기에에 머물면서 세밀하게 그려낸 브뤼쎌의 풍경을 통해 가능해진 일이다. 작가는 로기완의 일기라는 형식을 빌려 브뤼쎌의 거리들을 호명하고 이방인이 바라본 유럽인들의 인상을 끊임없이 묘사한다. 타인의 삶에 따스한 시선을 던지고 그것을 보듬는 글을 써온 작가의 관심은 이 소설에서도 여전한바, 스스로가 완벽한 타자가 되는 경험을 한 이방의 땅이야말로 타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기에, 한없이 미약한 존재로서 그들을 연민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를 사유하는 데 제격이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뭔가를 쓰겠다는 생각으로 벨기에까지 간 건 아니었다”(작가의 말)라고 밝히기도 했거니와 계획되지 않은 이야기를 이 한편의 소설로 탄생시킨 것은 그래서 어쩌면 작가에게는 하나의 과제이자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의 진수
덤덤한 듯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지닌 작가 특유의 문장은 이 소설에서도 빛을 발한다. 작가의 섬세한 문체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마치 내 앞에서 읊조리는 생생한 고백처럼 다가오게 한다.
파이프오르간 연주가 끝날 때까지 상상 속 로의 눈물은 닿을 듯 닿지 않는다. 너와 내가 타인인 이상 현재의 시간과 느낌을 오해와 오차 없이 나눠가질 수는 없다는 불변의 진리는 자주 나를 괴롭혔지만 가끔은 위안도 되었다. 나의 한계에 대해서 적어도 나만은 침묵할 자격이 있다는 믿음은 그러나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3년 전, 내가 앉아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어깨를 잔뜩 옹송그린 모습으로 온몸을 떨며 오열했을 로의 모습을 상상의 영역에 남겨둔 채, 나는 끝내 젖지 않은 내 메마른 얼굴을 한 손으로 거칠게 쓸어내린다. (113~4면)
‘로’의 몸속으로 들어와 맥박과 숨소리에 섞여 공명하던 ‘쌩 미셸 대성당의 종소리’(113면)처럼 작가의 아름다운 문장은 그렇게 은은하게 다가와 책장을 덮은 후에도 어느새 깊은 여운으로 하나하나 되살아난다.
연민과 유대가 빚어내는 삶의 희망
다른 사람에게 커다란 절망을 안기고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나’, 어떠한 보호와 책임으로부터 배제된 채 생존의 기로에 선 로기완, 어린 나이에 끝없이 상처를 입어야 했던 윤주, 그리고 숨겨진 과거로 평생 고통받아온 ‘박’까지, 『로기완을 만났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아픔과 절망으로 힘겹게 살아간다. 서로 다른 나이와 직업, 환경을 가진 이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슬픈 이야기들을 통해 작가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어엿한 주체로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위태로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은 저 고통에 매몰되지만은 않는다. ‘나’는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