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 CHE VIVE!
혁명을 꿈꾸며 사랑을 사랑하는 삶
“그대와 나는 세계에 관여한다 삶이라는 직업으로”
구름 위를 지나 당도한 또 다른 행성에서의 삶,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삶이라는 직업의 숭고함을 안다
그대는 그대가 꿈꾸는 삶을 선택했는가 삶에 의해 선택되었는가
바람이 불 때마다 뒤척이는 세계의 모습, 그대와 나는 세계에 관여한다 삶이라는 직업으로
-「나의 플럭서스」 부분
2011년 5월, 박정대의 시집 두 권이 동시에 출간된다. 그중 하나가 『삶이라는 직업』(문학과지성사, 2011)이다. 삶이 직업이라는 말에 독자들은 의아함을 품을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선택할 수는 있어도 ‘태어남’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직업’은 선택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지 않은가. 이 질문을 푸는 열쇠는 그의 시집 두 권이 한꺼번에 출간되는 이유에 있다. 천사가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모든 가능성의 거리』(문예중앙, 2011)에 담겼다면, 『삶이라는 직업』은 그 후 천사가 세상으로 내려와 직업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겪는 일들과 그에 따른 감흥을 고스란히 녹여낸 시집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아름다운 시절에 살기를
꿈꿀 수 있는 자유가 없다면 그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바닷가 조개껍질을 주워 화폐로 사용할 테다
[……]
그러니 누구든 지상의 양식을 독점하려 하지 말라
그 어떤 이유로도, 그 누구에게도 지구의 식량과 음악과 영혼을 독점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국경이 국경 안의 인민만을 배불린다면 그 국경은 타도되어야 하리라
-「그대들은 아름다운 시절에 살기를」 부분
이 적강 천사는 잠시 지상에 소풍 나온 구경꾼이 아니다. 그에게 “삶은 실제적인 것”이다. 그는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낭만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끊임없이 꿈꿀 수 있는 자유를 찾아, 음식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노래를 하고 사랑을 하며 살아갈 권리를 찾아 혁명을 외친다.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좀더 아름다운 시절에 살기를 바라며. 하지만 이 시집에서의 혁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체제의 전복, 이데올로기적 승리로서의 의미와는 결을 달리한다. 그에게 혁명은 원시림에서 마시는 뜨거운 수프, 사막에서 쓰는 한 줄의 시, 사랑 후에 피우는 담배 한 개비 그 자체이다. 이 시집의 해설자 강정 시인이 말하듯 그에게는 그만의 체 게바라가 있다.
당신을 향한 말레콘 해적 방송
카리브 해의 파도를 음악으로 바꿔 밤새도록 당신을 위한 단 하나의 해적 방송을 할 테야
당신만 들어주면 돼, 그러면 돼, 나는 밤새도록 당신의 귓가에서 파도치며 출렁일 테니 당신만이 꿈의 주파수로 날 들어주면 돼
베로니카 그러니까 기억해야 해, 꿈속에서도 잊으면 안 돼
사랑해, 그래 여기는 파도치는 말레콘 해적 방송이야
-「해적 방송」 부분
이제부터 당신만을 위한 말레콘 해적 방송이 시작된다. 이 해적 방송으로 당신은 카리브 해의 파도를 음악으로 바꿔 들을 수도 있고, 밤새 노란색 별들이 깜박이는 걸 볼 수도 있다. 당신이 텔레폰 성냥의 불꽃으로 전화를 걸어온다면 당신이 꿈꾸는 혁명의 레시피를 소개할 수도 있고, 가고 싶은 곳을 위한 여권도 만들어줄 수 있다. 박정대는 이번 시집에서 시를 쓰는 자신과 시를 읽는 ‘당신’을 잇고, 끊임없이 혁명과 사랑의 메시지를 타전한다.
영혼의 동지들
가스통 바슐라르, 갓산 카나파니, 닉 케이브, 라시드 누그마노프, 마르셀 뒤샹, 미셸 우엘르베끄, 밥 딜런, 밥 말리, 백성,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빅또르 쪼이, 피에르 르베르디, 아네스 자우이, 악탄 압디칼리코프, 앤디 워홀, 에밀 쿠스트리차, 장 뤼크 고다르, 조르주 페렉, 지아 장 커, 짐 자무시, 체 게바라, 칼 마르크스, 톰 웨이츠, 트리스탕 차라, 파스칼 키냐르, 페르난두 페소아, 프랑수아즈 아르디, 프랑수아 트뤼포
-「천사가 지나간다」 전문
지상에 내려온 천사가 오직 시인 하나만인 것은 아니다. 위 시에서 언급된 이들도 바로 전직 천사로서 삶이라는 직업을 수행한 영혼의 동지들이다. 이들은 세계에 대한 애정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던 철학자, 문학가, 음악가, 영화감독 등이다. 이 “혁명적 인간”들은 시집 중간 중간에 등장하며 그들의 행위나 언급이 콜라주처럼 이어 붙어 박정대가 의도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이 세계를 움직이는 건 몇 개의 비밀결사 조직, 가령 시로 암호를 타전하는 요원들, 드러나지 않는 영혼의 동지들”이 있으므로 그는 고독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L CHE VIVE!
시집 제목을 체 게바라 만세로 하자고 했더니 사람들이 웃었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언제나 무엇인가 남아 있다」 부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 게바라 만세란다. 자신의 고독과 더불어 하얀 침묵의 눈 속을 오래 걷고 싶어서 히말라야로 향하는 그는 고독의 투쟁, 침묵의 투쟁 속에서도 “체 게바라 만세/체 게바라 만세”라고 낮게 읊조린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적강 천사로서 삶과 세상에 부딪히고 긁히고 피 흘리며 살아가면서도 혁명을 꿈꾸는 의지가 전해져 읽는 이의 마음에도 한 점 불꽃이 일도록 한다. 이렇게 당신을 위한 해적 방송을 들으며 암호로 타전되는 영혼의 시를 해독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당신은 “얼굴에 콧수염을 붙인 천사”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 시집 소개 글
세계의 흐름과는 또 다른 시간 패턴 위에서 박정대는 세계의 통상적 명명법으로는 규정되지 않는 그 자신만의 ‘다른 이름’들을 적시한다. 그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을 때, 그것은 때로 음악이 되기도 하고, 빳빳하게 격절돼 있는 시간과 공간 사이의 틈을 벌려 누군가의 삶과 죽음과 사랑을 상연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시 뽀얀 먼지들이 접착력 강한 문자로 몸에 각인된다. 전 세계가 고독의 무늬로 휘황찬란하게 떠오르다가 사멸한다. 이것은 시의 독성(毒性)이기도, 존재의 오연한 독성(獨醒)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