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고전주의와 인상주의의 진정한 가교, 세잔
지난 2006년에는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의 서거 100주년을 맞아 대규모 회고전이 세계 곳곳에서 열렸고, 그를 새롭게 조명하는 갖가지 연구 발표가 이어졌다. 이 책 역시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해석의 여지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풍부한 의미와 깊이로 여러 사상가들을 매료시켜온 세잔의 작품 세계를 새롭게 들여다보려는 시도이다.
‘걸작’이라는 것이 특정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읽을거리가 풍부한 작품을 말한다고 할 때, 세잔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작가와 작품도 드물다. 세잔은 어찌 보면 그의 시대를 넘어서는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는 한 장르에 귀속되는 작가라기보다는 ‘모더니즘 회화’라고 하는 미술사에서 전혀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 작가이다. 그런 만큼 세잔을 조명하는 방식도 시대에 따라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띤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사실 당대의 미적 욕망을 반영한다 할 수 있다.
모더니즘 시기에는 세상을 원통, 구(球) 그리고 원추로 보는 세잔의 구조적 시각이 부각되었다. 20세기 입체주의는 세잔 없이는 불가능했고 세잔은 모더니즘의 핵심으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른바 포스트모던 시기에는 언어의 상징 기능에 해당하는 형태 및 구조보다는 세잔의 색채에 주목하여 이성과 합리를 넘어서는 그의 미적 역량과 그가 살았던 삶의 공간이 재조명되고 있다. 이 책에서 중요한 화두로 삼고 있는 것 또한, 이러한 두 양상 모두를 포괄하는 세잔 회화의 특징으로 이른바 ‘세잔 회화의 역설’이 바로 그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회화는 형태적인 대상성을 보유하면서도 색채의 유동성과 생동감을 함께 지닌다는 것이다. 세잔의 풍경화에서 보이는 거대한 바위는 견고한 입체이면서도 흔들리는 자연의 숨결을 함께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인 오늘날까지 그에 대한 연구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양 미술사에서 세잔의 의미는 확고하다. 그는 과거의 고전주의와 현대의 인상주의를 연결하는 진정한 다리였다. 세잔은 시간과 자연에 대한 인상주의의 근본 미학을 수용하면서도 견고한 형태와 깊이 있는 공간을 추구했다. 고전주의의 끝자락에서 시간의 영속성과 불변하는 미적 진리를 고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상가들을 매료시킨 지적인 화가
세잔은 서양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지적인 작업을 남긴 작가이다. 세잔은 표현의 문제를 넘어 미술의 근본 문제를 다룬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는 현상적인 묘사보다 대상 자체의 존재에 집중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주목하고, 궁극적으로는 ‘본다’는 감각을 탐구했다. 따라서 세잔이 던지는 화두는 단지 미술의 범주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철학적 사유를 풍부하게 하는 내용의 보고(寶庫)와도 같다. 내로라하는 숱한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세잔을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상가들은 물론, 들뢰즈, 라캉 등 현대 철학의 거장들도 세잔을 읽고 토론한다.
이 책은 세잔의 예술에 오랫동안 숨어 있던 의미들을 조명하기 위해 그의 작품에 대한 포스트모던 해석을 시도한다. 특히 미술과 연관되는 철학적 사고와 정신분석학적 인식을 활용하여 세잔의 작품을 들여다본다. 책의 내용은 세잔의 미술세계를 현대의 대표적인 사상가 여섯 명과 접목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지그문트 프로이트, 조르주 바타유, 질 들뢰즈, 자크 라캉, 모리스 메를로퐁티를 차례로 다루는 이 책은 세잔을 바라보는 여섯 가지 시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세잔에 대해 직접 글을 남긴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메를로퐁티는 「세잔의 회의」라는 중요한 논문을 썼고,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베이컨과 함께 세잔을 전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라캉과 바타유는 자신의 저술들에서 세잔을 암시하거나 어느 정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라캉은 『정신분석학의 네 가지 기본 개념』의 중요한 대목에서 대표성을 띤 ‘예술가’를 여러 번 언급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세잔이다. 크리스테바의 경우 세잔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그의 ‘멜랑콜리’ 이론은 세잔 회화의 미적 구조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이처럼 세잔의 작품과 직ㆍ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여섯 사상가들의 시각을 차례로 살펴보는 시도는 작품의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고를 기반으로 한다. 이를테면 크리스테바의 멜랑콜리 이론과 기호학적 시각은 세잔의 무표정하고 비인간적인 인물의 표상과 색채의 강도 사이에 근본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우울한 마스크가 표면적으로 정서를 가린다고 해도 심도 깊은 색채에서 정서의 깊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눈을 통해서는 세잔의 추하고 관능적이지 않은 누드화를 들여다본다. 특히 반즈 재단의 <대수욕도> 등에서 나타나는 성적 정체성이 불명확한 인물들에 대한 분석이 흥미로운데, 이들의 성적 이탈은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오이디푸스적 단계에서 거세공포를 경험하는 신체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타유의 에로티즘 미학과 초현실주의 개념으로는 성(性)과 폭력이 가득한 세잔의 초기 작업들을 들여다본다. 세잔의 초기 회화에서 나타나는 여성들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상당히 추할 뿐만 아니라 성적으로도 노골적이다. 사실 미술사에서는 세잔의 독특한 초기 작품들에 대한 가치평가를 보류해왔고,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 초기 작품들은 전성기 작품의 후광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바타유의 에로티즘 미학과 이질성의 철학은 세잔이 왜 사랑의 대상인 여성의 신체를 보편적인 아름다움과는 관계없이 표현했는지에 대한 해답의 단초를 제공해준다.
들뢰즈의 철학에서 중요한 ‘감각’과 ‘형상’의 개념은 세잔의 회화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심도 깊게 해준다. 세잔은 자신의 미학적 목표가 “감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들뢰즈가 사용하고 있는 ‘감각의 논리’라는 말도 실은 세잔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들뢰즈는 세잔의 작업에서 ‘재현’이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세잔이나 베이컨 같은 화가가 관심을 가진 것은 외면적인 유사성이 아니라, 순수한 감각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라캉의 주체와 시각구조에 대한 이론은 세잔의 미술작품을 이해하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한다. 특히 거울단계 이론과 응시 이론으로 세잔의 독특한 자화상과 <대수욕도>를 분석하는 대목은 작품과 이론이 맞아떨어지는 절묘함을 느끼게 한다. 마지막으로 메를로퐁티는 지각을 핵심으로 하는 현상학적 관점에서 세잔을 적극적으로 분석한다. 특히 메를로퐁티는 세잔의 후기 작업에서 보이는 표면 구성과 그의 수채화에 감탄하는데, 세잔에 대한 끈질긴 탐구는 그의 예술철학이 추구하는 방향을 보여준다. 메를로퐁티는 세잔의 회화에서 바로 자신이 추구하던 현상학적 지각의 시각적 구현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처럼 여섯 명의 사상가들이 공통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세잔 스스로가 캔버스를 앞에 두고 고민했던 화두이다. 즉,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눈이 경험하는 대상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시각의 메커니즘에서 주체와 대상은 어떻게 연관되는가, 주체와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은 어떠한가 등등. 이러한 화두는 결국 표상을 둘러싼 근본적인 문제들을 쏟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상의 여섯 가지 시각은 세잔의 색채와 흔들리는 공기가 드러내는 비시각적 영역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세잔의 시각적 표상을 통해 모더니즘의 언어중심적 담론이 미처 드러내지 못한 인간 존재의 본질에 다가서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여섯 명의 사상가들은 우리를 얽어매는 언어구조를 벗어나 사물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게 인도해준다. 이를 통해 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고정관념과 습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눈을 벗어나 순수한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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