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보편적 해방을 위한 지젝의 마니페스토!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며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한다!!
헤겔과 맑스, 라캉을 넘나드는 독창적인 사유로 전 세계의 지적 담론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Slavoj ?i?ek). 그가 이번에는 ‘차이’와 ‘미시적 담론’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부드러운 사유”를 비판하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되찾자!’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감행하면서, 이 책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를 내놓았다. 따라서 이 책은 인류의 보편적 해방이라는 가치를 설파하는 지젝의 (이론적) ‘투쟁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와 ‘평등’, ‘박애’와 ‘평화’ 같은 가치들은 거대 담론을 거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에 휘말려 사라져 버렸다. 또한 실패한 과거의 혁명들은 이러한 가치들을 불온한 것으로, 또 ‘전체주의’나 ‘폭력’, ‘테러’ 같은 부정적 단어들을 연상케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혁명의 ‘참혹한 폭력’이라는 더러운 물과 함께 ‘보편적 가치’라는 아이까지 버리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는 바로 이 ‘불온한’ 지점에서 시작한다. 인류가 해방의 대의(Causes)를 상실한 채 가치의 상대주의를 인정하고 거대 담론을 포기한 포스트모더니즘에 안주한 것을 비판하며,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보편적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는 ‘메시아적’ 관점”에 서려 하는 것이다. 현재의 인류는 (평등 없는) 자유민주주의에 멈춰서 있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적 욕망과 철학을 주입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진정한 ‘평등-민주주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실패한 혁명에서 잃어버린 보편적 가치들을 되찾고, 그 혁명들이 멈춘 지점에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를 위해 프랑스 혁명에서의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 스탈린 치하의 소비에트 연방, 마오쩌둥의 중국 문화혁명, 나치 파시즘을 옹호한 하이데거 등 ‘위대한 실패’의 역사를 재고찰하고 있다. 이러한 혁명적 시도들은 자기 나름의 역사적인 실패이자 괴물이지만 그것이 진실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이것들 안에는 자유민주주의자의 거부와 부정 속에서 사라진 ‘부활’의 계기가 존재한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따라서 잃어버린 대의의 옹호는 모든 폭력을 동원하여 대의의 완전한 실현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만약 불가피하다면 파국적인 재앙까지도 무릅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경제 위기는 모든 인간적?사회적 가치를 해체하여 ‘경제’의 문제로 환원한다. 현재의 한국 사회 역시 국민의 ‘대의’(representation)와 생존권 같은 기본적인 권리마저도 경제 논리에 복속되고 있다. 즉 ‘정치’가 실종된 ‘정치 위기’의 시기인 것이다. 지젝은 이때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정치’를 복원해 자본주의적 관계를 넘어서고, 사회적 욕망의 양식을 뒤바꿔야 하는 시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점이 바로 ‘경제 위기’이자 ‘정치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며, 이를 돌파해야 하는 지금-여기의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보편적 해방으로!>
오늘날 이데올로기의 무대에는 헤게모니를 다투는 여러 입장들이 난립해 있지만, 그들 사이에는 거대 담론의 시대가 끝났으므로 우리는 일체의 근본주의에 반대하여 ‘부드러운 사유’를 해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며,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고, 더 이상 거대 담론에 매달리지 말고 미시적인 담론들에 중점을 둬야 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다문화주의의 시대에서는 인류의 보편적 해방은 요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해방을 주장하는 이 책은 그 기획에서부터 포스트모더니즘과 명확한 대칭선을 그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젝은 ‘최신’ 포스트모던 좌파 담론을 이끌어가는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re)와 대립각을 세우며 비판하고 있다. 네그리는 노동조합의 계급적 권리를 보호하고 국가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하는 수정주의적 구좌파와 혁명주의적 구좌파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말한다. 오늘날 착취의 지배적인 형태는 지식노동의 착취로서 구좌파들이 고려하길 거부하는 새로운 ‘포스트모던’한 사회적 발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의 생각대로라면 좌파는 자기 혁신을 위해 들뢰즈와 네그리를 읽어야 하고, 유목적인 저항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젝은 이러한 문제 규정 자체가 문제의 일부분이라고 반론을 편다.
지젝은 랑시에르, 바디우와 함께 정치 본연의 적대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 둘의 순수 정치론이 경제 영역에서의 투쟁을 등한시하고 민주주의적 투쟁에만 초점을 맞출 때 지젝은 그들이 맑스주의를 벗어났다고 비판한다. 맑스에게 있어서 적대는 노동과정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경제는 단순히 재화를 공급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 간의 적대적인 관계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랑시에르나 바디우와 달리 지젝에게 있어서 진정한 정치란 경제 영역과 분리된 정치 영역에서가 아니라 생산관계 자체에서 일어나는 단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대칭점에서 지젝의 ‘보편적 해방’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지젝은 과거의 실패한 혁명을, 그 전체주의와 폭력을 그저 반복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혁명들이 ‘더 밀고 나가지 못한’ 것들을 더욱 철저하게 이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근대적 혁명은 불가능하거나 위험하다고 간주하면서 그 대신 자본과 국가권력 외부에서 비자본주의적인 생활형식을 실험하자든가, 후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그 자체로 이미 공산주의적 생산관계를 잠재적으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그저 부르주아 계급이 그것을 깨닫게 만드는 다중의 투쟁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젝이 보기에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장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없는 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카페인 없는 커피를 원하는 것처럼 혁명의 혁명성이 없는 혁명, 즉 가짜 혁명을 소비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카페인 없는 커피를 원하듯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가?
- 로베스피에르 없는 프랑스 혁명
로베스피에르는 평화주의자로서 위선이나 휴머니즘적 감수성 때문이 아니라, 국가 간 전쟁은 보통 개별 국가 내부의 혁명적 투쟁을 봉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전쟁을 반대한다. ‘전쟁에 대한’ 로베스피에르의 발언은 오늘날 특히 중요하다. 그의 발언은 그가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비록 전쟁이 혁명의 방어로 처방될지라도, 그것은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자들이 혁명적 과정의 급진화를 완화하기 위해 기획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전쟁에 대한 애국적 호소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래서 그의 입장은 사회생활을 군사화하여 독재적인 통제를 수행하기 위해 전쟁을 필요로 하는 자들과 정확히 반대된다. (본문 243쪽)
숱한 정적(政敵)들을 단두대 위에 세웠지만 결국 자신 역시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얼음처럼 냉혹한 푸른 눈의 혁명가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의 대명사로서, 또 혁명의 폭력성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 증거로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피 냄새 풍기는 그의 혁명에서 인류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폭력적인 혁명’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뿐인가? 지젝은 로베스피에르가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라는 현상은 혁명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혁명 자체의 한계 지표라고 말한다.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의 극단적 ‘폭력’에 대한 의존은 사적 소유와 같은 근본적인 경제 질서를 바꿀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일종의 히스테리적인 행위-표출인 것이다.
지젝은 일관되게 “이전까지 혁명적 시도의 문제는 그것이 ‘너무 극단적’이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충분히 극단적이지 못해서 그런 혁명적 시도 자체의 전제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