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에서 강도, 위조, 방화, 미제사건까지,
70가지 범죄로 조선사를 프로파일링하다!
인간은 시대를 불문하고 범죄를 일으켰고 조선시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조선인들은 어떤 범죄를 저질렀을까? 누가 수사하고 어떻게 판결했을까? 조선에만 존재했던 범죄도 있었을까?
한 마을이 사라질 뻔한 살인사건, 권력층의 사건 은폐, 반역으로 비화된 위조사건 등 조선을 뒤흔든 범죄부터 치밀하고 정교했던 검시와 과학수사, 부조리한 법 앞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 쳤던 재판 과정까지. 지위 고하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인간 군상의 욕망이 뒤얽힌 범죄사건을 통해 500년 조선의 죄와 벌을 속속들이 밝힌다.
“범죄와 그 처리 과정이야말로 당대 사람들의 본능과 민낯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조선인들이 남긴 가장 적나라한 삶의 모습을 파헤치는 작업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_본문에서
저자 박영규는 역사 대중화의 한 획을 그으며 정치, 사회, 문화 등 주제의 경계 없이 새로운 접근법과 입체적인 해설로 다채로운 조선사를 집필해왔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범죄를 주제로 조선사회의 면면을 엿보고, 그 안에 감춰진 평범한 조선인의 본모습을 들춰냈다.
지금까지 조선시대의 범죄를 다룬 책들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살인사건에만 주목했다면 이 책은 실록을 바탕으로 방대한 자료를 분석‧정리해 조선의 범죄와 수사, 재판을 총망라했다. 왕족뿐 아니라 여종, 노비, 승려 등 천인에서 평민, 중인, 양반까지 각계각층의 조선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룸으로써 필부필부, 갑남을녀의 일상과 희로애락을 읽을 수 있다.
조선을 뒤흔든 범죄부터 치밀한 과학수사,
정의와 부조리가 치열하게 다퉜던 재판 과정까지
조선인의 죄와 벌을 선명하게 복원하다
범죄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범죄가 일어나는 맥락은 시대마다 다르다. 조용한 선비의 나라,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어떻게 대담하고 적나라한 범죄가 일어날 수 있었는가? 신분사회의 한계 속에서 약자는 어떻게 범죄로 내몰렸는가? 음모와 간계, 편법이 난무하는 재판장에서 보통 사람은 무엇을 선택해야 했는가?
“권력 있고 돈 있는 자들은 살인을 하고도 온갖 이유와 구실로 감형을 받아 사형을 면하거나 무죄로 방면되기 일쑤였고,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은 작은 죄를 짓고도 하소연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 정의는 늘 백성의 삶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들에게 법이란 그저 수탈과 억압을 합법화하는 무형의 칼날일 뿐이었다.” _본문에서
조선에는 엄연히 법이 존재했지만 그 법은 결코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신분에 따라, 성별에 따라 같은 법 조항도 제각기 차별적으로 해석되었다. 정종 시기 곽충보라는 인물은 함부로 폭력을 일삼고 여인을 겁탈했으며, 민가를 약탈하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등 폭행, 강간, 갈취, 살인 등 죄목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닌 중죄인이었다. 하지만 공신이라는 이유로 직첩만 회수당했을 뿐 마땅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처럼 조선의 법은 권력층에 지나치게 관대했다.
그렇다고 모든 관리가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부정과 비리에만 골몰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검시와 재판에는 엄격한 절차가 존재했다. 검시는 교차 검증을 위해 초검과 복검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 검시를 일컫는 초검은 사건이 일어난 해당 관청의 수령이 맡고, 두 번째 검시인 복검은 관찰사가 파견한 인근 지역의 수령이 진행했다. 또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의 경우에는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현대처럼 3심제를 적용해 재판했다. 관찰사가 1심을, 형조에서 2~3심을 보았고, 최종 판결은 왕이 직접 내렸다.
이처럼 조선시대 역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범인에게 올바른 처벌을 내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불합리한 현실 속에서도 공정함을 추구하려는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500년 전 조선인과의 간극을 줄이고 시대에 대한 공감과 이해에 한발 가까워질 수 있다. 조선의 범죄와 수사, 재판의 모든 것을 담은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역사책에는 없는 날 것의 이야기!
조선이 보내온 의문의 고발장에 밀리언셀러 실록사가 박영규가 답하다
■ 이웃이 살해된 사건을 주민들이 숨겨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충청도 옥천군의 한 마을에서 사건 발생 4년 뒤에야 살인에 대한 고소장이 접수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오랜 시간 고발을 꺼린 이유는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문졸과 아전이 마을에 들이닥쳐 마구잡이로 노략질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피의자나 피해자의 이웃은 사건의 증인으로 조사를 받았는데, 당시에는 이들을 마치 죄인 다루듯 해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게다가 각종 형구를 가지고 수백 명의 관속이 마을로 들어와 주민들은 그들을 먹이고 재우느라 생업을 놓아야 할 지경이었다. 결국 살인사건이 터지면 지레 겁을 먹고 다른 마을로 달아나거나 한동안 산속에 숨어 송사가 끝나길 기다리기도 했으니, 마을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의 살인사건 중 80퍼센트는 암암리에 은폐되었다.
■ 선조는 누구를 보호하기 위해 살인사건을 덮었는가?
선조 시기 재상급의 고관대작 유희서가 칼에 찔려 처참하게 죽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범인으로 지목된 자들은 화적 떼였는데, 체포된 범인들이 연달아 감옥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수사관들이 겨우 밝혀낸 사실은 화적 떼에 살인을 청부한 자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감춰버린 듯 교사범은 찾아낼 수 없었고, 이 사건은 영원히 미제로 남고 말았다. 놀랍게도 사건을 은폐하고 포도청에 외압을 가했던 인물은 당시의 왕 선조였다. 그리고 재상의 살해를 청부한 범인은 선조의 큰아들 임해군이었다. 이렇듯 힘 있는 자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 협잡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 조선시대의 법의관, 오작인은 누구였는가?
검시를 책임지는 사람은 지방의 수령이나 포도청 또는 한성부의 관원이었지만 직접 시신을 살피고 상태를 파악하는 사람은 오작인이었다. 신분은 비록 노비였으나 이들은 조선시대의 법의학 전문가였다. 오작인은 시신의 전신을 조사한 후 검시관에게 소리를 쳐서 결과를 알렸다. 즉 검시관들은 시신을 직접 보지도 않고 오직 오작인이 파악한 내용에만 의존했다. 따라서 오작인이 제대로 검시하지 못하거나 시신의 상태를 속이면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대가를 받고 타살을 자살로 위장하는 등 오작인이 범인의 알리바이 조작에 가담하는 경우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