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영화의 역사를 이렇게 넓고 깊게, 이처럼 다층적인 시각으로 서술한 책은 한국은 물론이고 저자 자신이 공부한, 영화를 발명했던 프랑스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김성태의 『영화의 역사』는 감히 기념비적인 역작이라고 할 만하다. 마침내 우리는 영화를 이해하고 사유하기 위해 서가 한쪽에 꽂아두고 언제나 찾아볼 수 있는 영화 관련 참고서를 한 권 얻게 되었다.”
_이창동 (영화감독)
의미이기 전에 현상이었고 예술이기 전에 상품이며
이야기 이전에 세상을 담았던 영화의 ‘첫 번째 발자국’ 19C~1927
19세기 말, 영화가 나타나는 시기부터 유성영화가 등장하던 1927년까지의 영화의 역사를 다룬다. 세계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던 때, 영화가 태어날 수 있던 조건들을 역사적 배경과 지적, 예술적 흐름, 과학 문명의 발달을 통해 살펴보고 유성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다룬다. 그렇다고 오랜 과거, 무성영화 시대에 대한 역사적 조망은 결코 아니다. 당시 인류에게 영화는 무성이었다. 오히려 소리가 덧붙여진 영화를 유성영화로 따로 구분했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무성영화의 역사가 아니라, 인류에게 나타난 ‘영화’라는 도구의 정체이다. 1920년대 첫 번째 전성기를 맞이한 ‘영화’의 삶을 추적하며 인류에게 개념으로 확립된 ‘영화’, 오늘날 영화의 개념과 다르지 않은 ‘영화’를 캐는 작업이다. 이는 현재 우리가 보고 즐기는 ‘영화’의 의미를 진지하게 찾아보는 탐색일 것이다.
한국 영화학자가 새롭게 쓴 세계영화사
영화학자 김성태가 새롭게 쓴 세계영화사 <영화의 역사>는 영화의 역사적 사실만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영화사를 뒤집어 새롭게 읽어내며 영화에 대한 시선을 확장하고. 기존의 영화사가 왜 그렇게 쓰여야 했는지를 이해함으로써 자신만의 영화사를 구축해나가도록 돕는다.
이제까지 영화사는 새로운 매체에 관심을 지닌 지식인들의 관점에서 쓴 영화사, 유럽의 영화를 사유의 영화라는 기준에서 사조 중심으로 기술하거나, 할리우드를 산업과 상업적인 기준에 따라 기술한다. 예술적 고민의 흔적을 찾아내 그에 충실한 영화미학을 입증하거나 혹은 상업적 성공 안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갖춘 감독과 작품을 골라내어 평가한다. 어디를 봐도 '영화'의 특수성은 언급되지 않는다. 대부분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들로 채운다. 지금까지의 영화사는 잘 만든 영화의 기록들이었다.
이런 시선이 오늘날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를 가르는 터무니없는 미적 기준을 낳았고, 현대 영화산업의 기형적 성장을 초래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예술로서의 영화를 주장하는 쪽과 거대한 산업적 효과를 노리는 쪽의 은근한 대립, 바로 우리 대중들의 의식 속의 기묘한 갈등이 그것의 결과라 하겠다.
‘영화’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을 스크린 위에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출발했다. 영화는 상상해야만 이미지로 떠오르는 세계, 상상해야만 움직이는 세계가 아니라, 눈앞에서 움직이고 살아 있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새롭게 쓰는 영화사는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다’를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이해하고 더 ‘잘’ 보게 하는 근거들을 살펴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운동과 시간을 눈앞으로 당겨온 역사
영화는 에디슨과 뤼미에르 형제의 발명품이었고, 대중에게는 호기심이자 신종 사업 아이템이었다. 또한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새로운 시장과 산업이었고 할리우드라는 신대륙을 탄생시켰으며, 단순한 출연자를 연기자나 스타로 만드는가 하면, 제작 노동자이던 감독을 예술가와 창작자로 변모시키거나, 독립 제작사들의 경쟁을 촉발하고, 다양한 일자리와 체제를 창출하며 세계 굴지의 거대한 기업들을 일으켰다. 베르그송과 들뢰즈 등의 철학자들에게는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었으며, 그 자체가 자본이자, 종교였으며, 여러 갈래의 사조가 되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산업과 예술의 영역 안에서 학문이 되었다. 이처럼 영화는 모든 시대의 다채로운 의미였다. 이 복잡다단한 과정 안에 대체 얼마나 놀라운 뒷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영화의 역사’라고 하면, 영화가 처음 발명되던 1895년에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보다 선행해야 할 것은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인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제일 먼저 영화로 만든 서사, ‘이야기’를 먼저 꺼내 들기 일쑤다. 하지만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하여 선보인 것이 과연 ‘이야기’일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태어나는 인간처럼, 영화도 탄생할 때 ‘이야기’를 입고 태어나지 않았다. 당시 뤼미에르가 준비한 상영회는 마치 우리가 실수로 휴대전화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눌러 기록된 아무 의미 없는 10초짜리 영상 따위였다. 자, 그때의 영화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에서 어떻게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영화가 나타나게 되었을까?
그날, 뤼미에르의 상영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야기’를 감상한 것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은 스크린에 비친 무의미한 움직임을 보았다. 시간과 운동이 기계로 인해 되돌려지고 눈앞에서 재구현되는 기상천외한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여기에 서사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초기의 영화다. 이날은 운동과 시간을 다룬 최초의 사건이자, 인체의 시지각 작용을 구현한 과학기술로서의 영화가 발명된 날로 인류사에 기록된다. 그 뒤로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저 이 의미 없는 움직임을 보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했다.
‘움직임’을 재현함으로써, 영화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눈앞의 ‘현상’을 인류에 들이민다. ‘현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영화를 즐기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개념이다. 저자는 서사를 걷어낸 자리에 바로 ‘현상’이 있음을 똑똑히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는 철학자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사유를 관통하는 물질과 시간, 움직임의 의미들을 영화를 통해 설명하고, 기술의 혜택에 익숙해져 놓치고 있던 21세기의 우리에게 ‘현상’의 낯섦을 일깨워 영화의 실체를 드러낸다.
한편, 오락물이자 상품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대중의 관심과 돈의 흐름에 크게 좌우되어, 문화나 예술로 인정받지 못한 채 줄곧 서커스의 묘기처럼 소비되었던 것 역시 영화였다. 그러나 영화는, 그 끈질긴 생명력과 변화에 대한 갈망으로 점차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유럽과 신대륙을 넘나들며 편집과 미장센, ‘이야기’를 시도하고, 배우와 감독, 장르와 스타일, 사조를 탄생시키는 것은 물론, ‘할리우드‘라는 제국과 굴지의 기업들을 일으키며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한다.
영화의 정의, 그리고 움직임과 현상
Movie, Cinema, Film. 우리가 누구나 ‘영화’라고 해석하는 단어다. 하지만 한 단어로 설명하기에 영화는 제법 많은 정의를 가졌다. 1894년,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 구현해 낸 짧은 ‘움직임’도 영화고, 제작자들이 다루던 필름도 영화며, 서사를 가진 하나하나의 작품들도 다 영화다. 이제껏 이 의미들을 ‘영화’라는 한 단어에 뭉뚱그려 사용해 온 것이다. 영화의 개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말에 영화가 가진 이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할 단어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영화라는 한 단어로 두 개념을 통칭하면서 모든 관심을 영화 속 ‘이야기’에만 쏟는다. 서점의 영화 코너는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 책들로 가득하고, 심지어 영화 서적과 영화들을 예술로 분류한다. ‘영화 속 이야기’라는 문장을 뒤집으면 ‘이야기 바깥에 영화’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영화’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에디슨과 뤼미에르 영화의 차이점도, 둘 중 뤼미에르만 영화의 발명가로 인정받는 것도, 에디슨이 어떤 인물이며 어떻게 몰락했는지도 모른다. 극장이 어떻게 탄생하고 발전하여 지금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고, 영화의 중심지가 프랑스가 아닌 미국인 까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