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 없는 낙관론자 스티븐 핑커에 대한
역사학계의 첫 전면적 비판서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대표작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원서 2011년, 한국어판 2014년 출간)는 인류사에서 “문명화과정에 따른 폭력성의 순화와 평화화”로 인해 폭력성이 지속적으로 감소해왔다는 낙관적 주장으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어 핑커는 후속작 《지금 다시 계몽: 이성, 과학, 휴머니즘, 그리고 진보를 말하다(Enlightenment Now)》(원서 2018년, 한국어판 2021년 출간)를 통해 자신의 낙관적 진보관을 더욱 공고화했다.
사실 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사회과학 전 분야의 숱한 학자들로부터 광범위하게 비판받아왔는데, 의외로 ‘폭력의 역사’에 바탕을 둔 이 책에 대해 정작 역사학계의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이에 미국 뉴캐슬대학 역사학 교수이자 폭력연구센터 설립자인 필립 드와이어와 미국 일리노이대학 역사학 명예교수 마크 S. 미칼레가 본격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역사학자들과 힘을 모았고, 2017년 《히스토리컬 리플렉션스(Historical Reflections)》 특별호에 비평 논문 11편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발 더 나아가 이들은 각 논문의 분량을 더하고 빠진 역사 분야를 보강하여 최종 결과물을 펴냈다. 그것이 바로 이 책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다.
몰이해와 왜곡에 맞선 엄밀하고 합리적인 반박
“이 책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을지도 모르는 현상을 다룬다. (…) 기나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폭력이 감소해왔고, 어쩌면 현재 우리는 종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13쪽)
“핑커는 독자들이 자신의 발상에 관한 내용을 평가하지 말고, 자기가 무슨 예언자나 프로메테우스 같은 인물처럼 인류의 과거·현재·미래에 관한 진리를 우리에게 전달해준 것을 그저 ‘기뻐하기’만을 바란다.”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 22쪽)
스티븐 핑커는 서구 문명과 자본주의가 폭력적이고, 불평등하고, 부정의하다기보다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한다. 핑커에 따르면, 폭력은 일탈 현상이지 결코 자본주의가 가차 없이 전 지구적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징후가 아니다.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에 글을 실은 다양한 분야의 역사학자들은 과거가 폭력적이었다는 데 반대하지 않으며, 오늘날의 삶이 전보다 덜 폭력적이라는 핑커의 주요 논지가 필연적으로 틀려서 그를 비평하는 게 아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핑커와는 대조적으로 폭력이 타고나는 것이라고 믿지도 않고, 인간이 생득적으로 폭력적이라고 보는 세계관을 믿지도 않는다. 그런 만큼 책은 핑커가 내세우는 계몽주의 프로젝트인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와 《지금 다시 계몽》의 핵심인 비판적 질문과 탐구라는 최고의 정신에 따라 논의를 제시한다.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에서 저자들은 핑커의 잘못된 기본 개념부터 원천자료에 대한 몰이해, 통계의 오용 및 편파적 해석, 반대증거의 무시, 인지적 편견, 폭력의 편협한 범주, 피해자의 고통이 아닌 공격자의 분노회로가 중심이 되는 폭력관, 자본주의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신념, 폭력의 심리에 대한 논증의 기반인 역사적 조건의 비(非)고려, 나머지 세계에 눈감는 서구중심적 역사관에 이르기까지 핑커의 비학문성과 그에 따른 맹목적 결론에 대해 비판적 의문 제기와 합리적 반박을 제기한다.
문제는 ‘이러저러한 시기는 얼마나 폭력적이었나’가 아니라
‘이러저러한 시기는 어떻게 폭력적이었는가’이다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는 지성의 역사, 감정의 역사, 문화사, 사회사, 의학사, 고대사, 중세사, 근현대사, 유럽사, 지역사, 형법사. 환경사, 생물학·고고학의 역사 등의 학제간 방법론이 동원되어 다방면으로 핑커의 저술을 비평하고 있지만, 핑커식 역사에 반대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마치 사망자 수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인 양, 과거의 모든 잔혹행위를 똑같이 취급한다는 점이다. 종류도 엄청나게 다양했던 이 잔혹행위들은 그것들의 의미를 규정하는 역사적 맥락에서 벗어나 왜곡되었고, 잔혹행위가 벌어진 시대나 그 행위를 둘러싼 문화적 상황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폭력은, 용인된다고 여겨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따라 서로 다른 상황에서 서로 다르게 사용되어왔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러저러한 시기는 얼마나 폭력적이었나”가 아니라 “이러저러한 시기는 어떻게 폭력적이었나”이며, 폭력은 역사성과 사회성 모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이 “홀로코스트는 현대성의 산물로서 일시적 광기 아닌 반복가능한 현재”라고 한 통찰이 의미심장하게 공명하는 지점이다.
“선사시대의 무정부 상태”에서 “이성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다다른 문명화 및 계몽주의 이후의 현대는 그러나 아직 “천사들이 발 딛기 두려워하는 세상”이다. “우리의 이 세계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선의 세계”라는 스티븐 핑커의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타파하려는 이유는, 당대에 대한 근거 없는 긍정성은 앞날에 대한 방향성이나 “진보”를 결코 제시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핑커의 이야기에서 목소리와 행위주체성이 부정된 사람들은, 그가 평화와 진보의 사자(使者)로 그리는 서구의 정부들이 주도한 엄청난 폭력에 빈번히 고통받은 이들이다. 이는 권력에 의해 오랜 세월 동안 역사 서술에서 배제되어온 종속적 지위의 인간 집단에 역사 주체로서의 제자리를 되찾아주려는 당대의 역사인식과 심하게 괴리되어 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는 최근 전 세계 역사학계의 동향과 역사인식이 충실하게 반영된 역사학 개론서로도 읽을 만하다.
책의 내용
제1장 스티븐 핑커와 역사에서 폭력의 본성
핑커의 폭력관에 숨겨진 이데올로기적 의제(신자유주의 및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와 자유시장 및 서구 문명은 압도적으로 유익하다)를 지적하며, 문제는 “이러저러한 시기는 얼마나 폭력적이었나”가 아니라 “이러저러한 시기는 어떻게 폭력적이었나”라고 강조한다.
제1부 해석
제2장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의 내면의 악마들
핑커의 표현을 빌려 핑커 속의 “내면의 악마들”이 책임감 있게 학문을 해야 할 그의 의무를 압도해버려 유럽의 중세가 야만적 중세로 악마화되었음을 밝히고, 폭력의 심원한 역사를 말할 때에는 가해자의 분노회로가 아니라 피해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제3장 스티븐 핑커와 폭력의 역사 기술에서 통계의 사용과 오용
핑커가 비(非)국가 사회가 근대의 국가 사회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데서 정량적 통계 기록을 선별하고, 과잉해석하고, 단순화하고, 심지어는 조정해서 자신의 거대서사에 끼워 맞추고 있음을 톺아보며 “더 섬세한” 정량적 분석의 필요성에 주목한다.
제4장 진보와 진보의 모순: 인권, 불평등, 폭력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인권과 불평등과 폭력의 영역에서 크나큰 진보가 있었으나 그 성과들은 결코 한결같거나 꾸준하지 않았음을 짚어보며, 핑커는 복잡성과 모순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바 삶이 항상 상승 궤도상에 있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논증한다.
제5장 스티븐 핑커의 기술관료적 신자유주의, 그리고 그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
기술관료제(테크노크라시)와 신자유주의를 짝지으려는 핑커의 모순적 시도에 대해 알아보며, 그 둘은 동등한 시민집단이 공동선을 추구하는 방법들을 모색하고 집합적으로 고안해내는 절차라고 정의된 민주주의 정치에 대해 공통적으로 의구심을 보인다고 설파한다.
제6장 스티븐 핑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문명화과정》
핑커가 폭력의 장기적 감소를 설명하고 그것을 미래로 투사하는 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