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노통브에 비교되기보다 뒤라스의 길을 밟고 싶다.”
스위스의 화제 작가 안느-실비 슈프렌거의 모데라토 칸타빌레,
보통 속도로 노래하듯이 그려지는 세계, 보통 속도로 노래하듯이 찢어지는 세계.
매혹적인 문체, 중세 죽음의 우화 같은 결미!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장면들이 연속으로 등장하는 도발적인 소설
온갖 종류의 믿기지 않는 음식물로 뱃속을 채우고, 뒷거리를 배회하며 신을 부르는 클라라 그랑은 과연 누구인가? 부활절을 맞은 로잔의 흐린 아침, 생-발랑탱 성당에서 사제와 목사들이 인간의 뇌와 심장에 일대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나눠주는 성체를 훔쳐 입에 집어넣을 수 있는 이 여자는 누구인가?
잔뜩 배부른 상태로 읽는 이에게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클라라의 방황을 통해 형상화된 것은 결국 성과 순수, 정신과 육체라는 영원한 파라독스를 어떤 식으로 무시해야 할지 모른 채 좌절감에 빠지고 만 젊은 여인의 초상이다.
욕망과 구원, 성스러운 것과 타락한 것, 영혼과 육체, 사랑과 폭력, 순수와 죄의식이 부르는 절망의 카타르시스
<아귀>는 날 것째로 먹히는 짧은 소설이다. 27세의 폭식증 환자 클라라 그랑의 이야기로, 그녀는 동갑의 거식증 환자(라고 그녀가 믿고 있는) 프레데릭을 사랑한다. 변기와 찬송가 사이를 오가는 이 탐식의 이야기에는 두 아버지가 서성거린다. 하나는 섹스에 사로잡혀 있는 생부, 또 하나는 하늘에 있으며 역시 그녀를 보호해주지 않는 아버지(신)이다. 클라라는 밥통이라는 이름의 괴물로부터 스스로를 정화하고 해방하고 싶어하며 구토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한다. 또는, 매춘을 통해 자신의 죄를 씻어내려 하고, 결코 깨끗해졌다고 느낄 수 없으면서도 정성스레 몸을 닦는다. 너무 이른 나이에 인간들의 사악한 세상에 내던져진 클라라는 성녀와 암퇘지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녀는 자기 몸에 뚫린 모든 종류의 구멍을 막으려 하고 마치 푸아그라(거위 간)를 만들려는 듯이 자기 몸에 음식물을 쑤셔 넣는다. 동시에 그녀는 학교 친구들의 피맺힌 상처를 빨아줄 수도 있고 엄마가 화장실에서 내는 불쾌한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문 앞에서 찬송가를 부를 수도 있는 여자다. 하지만 문란한 행동도, 기도도, 속죄로 이르는 필연적 길은 아니다. 길을 잃었으나 무리로 되돌아가기를 거부한 양인 클라라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기에 충분한 아귀라는 이름의 세제는 없다.
아귀라는 이름의 세제로
끈적한 더러움이 지워질 때
신은 너의 눈앞에
너무나도 탐욕스런 내 살에
나는 나의 추함을 불평하고
당신의 앙상한 몸을 즐겼지
기억하라, 탐욕의 몸뚱이여
너는 마른 이들의 족속에게도
네가 괴롭히는 신에게도 속해 있지 않아 (p.97)
육체적 충만감에 대한 갈구와 이를 해소하려는 시도가 빚어내는 허기의 악순환
19세기 말의 잔혹극 같은 분위기로 끝을 맺는 <아귀>는, 읽는 이를 불편하게 하는 동시에 그 효과적인 문체를 통해 불과 몇 줄만으로도 작품 속에 빨려들어가게끔 만드는 소설이다. ‘주제의 무거움’, ‘장면들의 도발성’, 그리고 ‘요령 있게 부려진 문체가 그 장면들을 다룰 때 풍기는 어떤 과도한 여성스러움’, 이 세 요소들이 이 짤막한 소설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고 여겨질 수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면에서는 딱히 설명되지 않는 더부룩한 불쾌감이 뱃속에 한층 묵지근하게 얹히는 느낌이 일 수도 있다. 이 점이 핵심이라는 것을 간과하지 않은 슈프렌거 역시 그것을 가급적 평이하고 중성적인 단어들과 부드럽고 매끈한 문체, 또 불필요한 맥락을 제거하고 한칼로 자른 듯 날렵한 텍스트를 통해 상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설명한다. 공허한 내면과 비대한 몸(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왜곡된 상)을 가진 여주인공이 잠겨 있는 푹신하고 물렁물렁한 지옥의 폐쇄성 속에서 그녀의 분열된 삶만큼이나 상이한 특성들을 물고 있는 <아귀>는 불행한 유년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폭식증 환자 클라라 그랑의 심리 추이를 따라 펼쳐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무거운 주제와 충격적인 에피소드들이 힘들게 읽히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슈프렌거의 문체는 간결하고 일상적이며, 한마디로 말해 쉽게 잘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