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충 성!” 대대장님이 지나다니면 한 명씩 손을 내밀어 악수한다. 우린 관등성명과 함께 앞으로의 군 생활에 대한 짧은 각오를 말해야 한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같은 식상한 말은 싫다. 내 다짐은 이거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임하겠습니다." 벌써부터 부정적인 감정이 들어서다. 강원도 산골에 위치한 작은 포병 부대에서 포수로 복무하게 된 육군 이등병 조은일. 모르는 것이 많아 일단 주특기 공부에 매진해 보지만 험한 부대 분위기와 거친 사람들에게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 누구나 한 번쯤 군 생활에 찾아오는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그는 행정 분과로 보직을 옮긴다. 하지만 이미 부대 사람들에게 박힌 ‘폐급’ 이미지를 지우기란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요즘 들어 부쩍 자주 하게 된 죽는 상상은 그를 더욱 위험하게 만든다. 입대 전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할 때도, 훈련소에서도, 그리고 자대에서 계급별로 신인성 검사를 할 때도 ‘그 문항’을 항상 보았다. 조은일은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 온 사람이다. 입대 전부터 그는 “까라면 까”로 대변되는 상명하달식 명령체계 속에서 자신이 잘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아니나 다를까 훈련소에서부터 또다시 위험한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낸다는 말이 있다. 그렇듯 조은일도 힘든 일 없냐며 걱정해 주는 사람에게, 자살을 생각해 본 적 있는지 묻는 심리 검사지에 성실히 답하여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려 했다. 그러나 이는 좋은 판단이 아니었는데. 상담을 하면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왠지 우울해지기만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나면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진다고. 그러나 예외가 있다. 바로 자신을 우울한 사람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자들이다. 스스로를 우울한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나면 그 이외의 모습은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도 주변에 잘 맞는 사람이 없어 외롭다고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바로 자신의 행복한 모습을 자기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그 사람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우울함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 조은일도 마찬가지다. 상담을 받아 보면 어떻겠냐는 조언, 정신과 약을 처방받아 보라는 권유는 전부 다름 아닌 그를 위하는 마음에서 왔을 것이다. 그러나 우울한 자기 정체성 안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면 이는 소용이 없다. 그 사실을 직접 깨닫기까지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과 고통이 필요했다. 지금도 군대 꿈을 꿉니다. 어찌어찌해서 지금까지 사회에서 겪은 시간이 전부 휴가였고, 전역 절차를 위해 부대에 복귀한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왜 입대 꿈을 안 꾸는 걸까요. 거기서 뭔가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으로는 전역했지만, 심리적으로는 전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겁니다. 어쩌면 그때 거기서 내가 죽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사망한 조은일의 심리적 부검에 참여하고 계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