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한국 현대사는 산업화, 민주화와 함께 치열한 과학화의 과정이었다”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 근현대 한국 과학자 이야기
★전북대 과학학과 김근배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의 15년 연구 성과
★여러 기관에 흩어져 있던 사진과 유족들에게 제공받은 소중한 자료가 한 권에!
★장하석 케임브리지대학 석좌교수, 유튜브 ‘안될과학’ 크리에이터 강성주 박사,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유욱준 추천!
최초의 조선인 화학자부터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 스타 과학자까지,
그때 과학자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과학자가 되는 길은 험난했다. 이공계 고등교육 기관은 1915년에 개설된 연희전문 수리과(이후 수물과로 개칭) 정도가 다였고, 법학부와 의학부만 있던 경성제국대학에 처음으로 이공학부가 설치된 건 1941년이다. 따라서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본이든 미국이든 낯설고 먼 해외로 나가야 했고, 여러 차별과 곤궁함 속에서 고군분투해야 했다. “어렵게 학업을 마친 뒤에도 전문직으로 진출하고 연구 기회를 얻기까지는 많은 걸림돌이 있었다. 그럴지라도 놀라운 열정으로 길을 만들고 선명한 발자국을 남긴 인물들이 속속 출현했다.”
1904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노동 이민을 떠난 리용규(1881~미상)는 미국 본토로 건너가 주경야독 끝에 네브래스카대학 화학과에 진학한다. 학부를 마치고 석사 학위까지 받은 그는 시카고공업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숭실전문 교수가 되었다. 한국인 첫 화학자라 할 그는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일환으로 만년필용 모란잉크를 개발하는 등 산업 발전에도 기여했다.
도쿄제국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김량하(1901~미상)는 일본 최고의 연구기관인 이화학연구소의 첫 조선인 연구자였다. 그는 세계 최초로 비타민E 결정체 추출에 성공해 언론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었다.
김삼순(1909~2001)은 식민지 여성이라는 이중 차별을 극복하고 조선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제국대학 이공계(홋카이도제국대학 식물학과)를 졸업했다. 57세에는 한국 여성 최초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느타리버섯 인공 재배에 성공해 느타리를 우리에게 친근한 식재료로 만들었다. 대전의 성심당 대표와 만나 발효빵 개발에 관한 조언을 주기도 했다.
수학자 리림학(1922~2005)은 해방 직후 남대문 시장 쓰레기 더미에서 《미국수학회보》를 발견하고, 거기 실린 논문에 제시된 미해결 문제를 풀어서 그곳에 논문을 게재한다. 《미국수학회보》에 실린 리림학의 논문은 해방 후 한국 연구자가 국내에서 연구한 성과를 영어권 해외 학술지에 발표한 첫 사례였다. 이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에서 연구하며 대수학 분야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리 군(Ree group)을 발견한 리림학은 군론에 근원적으로 공헌한 21명의 수학자로 기록되었다.
이 밖에 두만강 유역의 모래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을 발견해 동아시아에는 다이아몬드가 없다는 통념을 뒤집은 지질학자 박동길, 일본에 양자화학을 처음 도입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리-아이링 이론을 남긴 세계적인 화학자 이태규, 한국인 집단 유전학 연구로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잇달아 논문을 발표한 강영선 등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활동한 한국의 첫 과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 나비 박사로 알려진 석주명(그러나 그는 박사 학위를 받지 않았다), 프린스턴고등연구소 이론물리부장을 지내며 ‘노벨상 메이커’로 불린 이휘소 등 한 번쯤 이름은 들어 봤지만 제대로 몰랐던 인물들의 진면목도 발견할 수 있다.
한국 과학사의 잃어버린 고리, 근현대 과학자는 왜 역사에서 사라졌을까
근현대 한국 과학자들이 유독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건 왜일까? 우리나라 과학자라고 하면 왜 많은 이들이 아직도 장영실, 이순지 같은 조선시대 인물이나 김상욱, 허준이 같은 요즘 과학자 이름만 떠올릴까. 이순지와 허준이 사이에는 분명 이춘호, 최윤식, 장기원, 박정기, 리림학, 권경환, 박세희 같은 근현대 수학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조선시대와 21세기 대한민국을 잇는 근현대 과학자들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사회에서 잊혀졌을까? 격동의 역사가 아로새겨진 과학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얼마간 짐작할 수 있다.
해방 직후 미군정청은 경성대학(경성제국대학)과 여러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종합대학을 만드는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을 추진했는데, 그에 대한 찬반 논쟁이 격하게 일어나면서 일명 ‘국대안 파동’으로까지 치달았다. 좌우 이념 대립까지 맞물린 국대안 파동은 과학자 사회를 분열시켰다. 많은 과학자들이 월북하거나 납북되었고, 이태규 같은 과학자는 미국으로 떠났다. 곧이어 발발한 전쟁과 증폭된 이념 갈등은 여러 과학자의 목숨을 앗아갔다. 전쟁과 그 뒤로 이어진 독재 정권의 통치는 해외에 체류하던 과학자들의 발을 붙들기도 했다. 그나마 남은 과학자들조차 이념으로 재단되어 배제되고 지워졌다. 북한에서는 정풍운동으로 과학자들이 숙청당했고, 남한에서 ‘빨갱이’ 과학자를 언급하는 건 금기시 되었다.
정두현(1887~미상)은 위기의 순간마다 새로운 배움을 찾아 유학을 떠나 농학, 생물학, 의학을 차례로 공부하고, 세 분야에서 모두 연구 경력을 쌓은 과학자다. 숭실전문 교수와 인정도서관 관장을 역임한 그는 해방 후 북한 김일성대학 의학부장이 되었으나 1951년부터 행적이 사라진다. 소련에서 열풍처럼 유입된, 유전자를 부정하고 환경적 변이를 강조한 미추린-리센코 학설을 반대하다 학장에서 물러났고, 유전학 강의마저 폐지되면서 교재와 연구물도 압수당했다. 그는 그렇게 남과 북 모두에서 잊혀졌다.
세계 최초로 비타민E 결정체 추출에 성공해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었던 김량하는 해방 후 여러 세력의 주목을 받으며 중요 인물로 떠올랐다. 보수 우익 한민당, 중도좌파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좌익 계열의 조소문화협회 등에 참여하며 정치적 격랑에 휩쓸렸던 그는 분단 후 북한에서 활동하다 정풍운동으로 숙청당했다.
나비 박사로 알려진 석주명은 한국전쟁 시기 평안도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공산당으로 오인돼 길에서 총을 맞아 사망했다. “많은 사람이 빨갱이로 내몰려 무참히 폭행을 당하거나 살해를 당하던 시절이었다.”
과학자라는 렌즈를 통해 새롭게 들여다보는 한국 현대사
김량하의 사례에서 보듯이 해방 후 과학자들은 당대의 엘리트로서 연구와 교육 외에도 사회적으로 다양한 역할을 감당해야 했고, 때론 정치적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연희전문 수물과의 첫 조선인 교수였던 수학자 이춘호(1893~1950)와 최초의 이학박사 이원철(1896~1963)은 해방 직후 보수 우익 정당 한민당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해방 후 서울대 첫 한국인 총장이자 2대 총장으로 재임한 이춘호는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반민특위 특별재판관으로 선임되었고,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으나 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끌려가 평양 감옥에서 사망했다. 해방 후 관상대 초대 대장과 인하공대 학장으로 재직한 이원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조선에 소개한 수학자 최윤식(1899~1960)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위한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에 연루되기도 했다.
한국 담수어를 연구하여 총 8권의 책으로 집대성한 ‘물고기 박사’ 최기철(1910~2002)은 4,19 혁명 때 계엄령하에서 전국교수단 258명의 일원으로 시국선언문 발표에 참여했으며, 한국민물고기보존협회를 만들어 멸종 위기에 처한 물고기를 살리기 위해 애썼다.
한편, ‘국의 방법’을 창안해 허리케인과 태풍의 장기예보를 실현했던 국채표는 박정희 정권 때 관상대 대장으로 있으면서 ‘인공강우’를 전략적으로 이용해 한국 기상시스템을 현대화하고 기상학 발전을 도모했다. 박정희 군사정부에서 “인공강우는 가뭄 해결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전 정부와는 다른 혁명정부의 이벤트가 될 획기적인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매력적이었다.”
이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