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나를 도둑, 표절자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내 말을 들어보라. 생각처럼 그렇게 끔찍하지 않다.”
출판산업과 문화전쟁의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우정과 배신, 창조와 표절,
예술의 상품화, 인종차별과 역차별, SNS 전쟁에 관한 안전벨트 없는 롤러코스터
★★★아마존닷컴, 반스&노블, 타임, 굿리즈 초이스 어워드 올해의 책★★★
★★★뉴욕타임스, 선데이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
★★★틱톡 2024 올해의 책 최종 후보★★★
★★★영국도서상 수상, 리즈 위더스푼 북클럽 PICK★★★
20대 중반의 나이에 네뷸러상, 로커스상, 영국도서상 등을 수상하며 영미권에서 가장 핫한 젊은 작가로 떠오른 R. F. 쿠앙이 자신이 반짝 스타가 아니라 대중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차세대 작가임을 전 세계 독서계에 강렬하게 각인시킨 문제작. 이 소설이 말 그대로 문제의 작품인 이유는 작가의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배경과 신념을 넘어 성역 없는 모두까기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책은 출판이 성사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에이전트를 비롯한 주위의 많은 이들이 우려를 표했지만 작가는 애초의 뜻을 거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좋아, 끝까지 가보자.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가 한 모든 일을 하나하나 비웃어보자.”
『옐로페이스』만큼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소설도 없다. 책 제목과 표지만 봐도 이 소설이 어떻게 흘러갈지 뻔히 보이는 것만 같다. ‘옐로페이스(Yellowface)’는 블랙페이스처럼 백인이 아시아인을 흉내 내기 위해 아시아인의 용모를 과장되게 표현하는 무대 분장에서 유래된 것으로, 아시아인을 희화화하는 인종차별적 문화 행위를 말한다. 게다가 저자는 어릴 적에 미국으로 이주해 온 중국계 작가다. 따라서 백인 주류 사회의 인종차별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비판이 줄줄이 이어질 것만 같다. 그러나 이 소설의 진짜 시작은 그다음부터다.
그녀의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문제는, 그녀가 그 책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쿠앙은 어떻게 최근의 모든 책 스캔들을 풍자 스릴러로 바꾸었는가?
『옐로페이스』는 시대정신으로의 출발이자 도약이다.” (LA타임스)
준(주니퍼)은 같은 예일대학 출신에 작가라는 공통점 때문에 아테나와 친하게 지내지만, 둘은 달라도 너무나 다른 처지였다. 중국계인 아테나는 탁월한 글쓰기 재능에 마치 앤 해서웨이처럼 큰 키과 가느다란 체구, 발레리나처럼 우아한 자태 덕에 단숨에 출판계의 스타로 떠오른 작가였다. 반면에 준은 아무리 애써도 작가로 주목받아본 적이 없는 데다 갈색 눈,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평범한 백인 여성에 지나지 않았다. 준은 별 볼 일 없는 자신의 처지에 한탄하면서 아테나를 질투한다.
그런데 아테나의 넷플릭스 판권 계약을 축하하는 둘만의 술자리에서, 아테나가 팬케이크를 먹다가 그만 질식사를 하고 만다. 엉겁결에 아테나의 미발표 소설 초고를 집으로 들고 온 준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초고를 고쳐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기로 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복무한 중국인 노동자들의 이야기였다.
중국인 이야기를 백인 여성 작가가 발표할 경우 여러 문제(문화적 전유, 착취 등)가 발생할 수 있다는 출판사의 권유에 따라, 준은 아시아인을 연상시키는 ‘주니퍼 송’이란 이름(과 인종적으로 모호해 보이는 작가 사진)으로 소설 『최후의 전선』을 출간한다. 그동안 준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출판사의 대대적인 지원과 마케팅에 힘입어 『최후의 전선』은 ‘여름에 읽기 좋은 최고의 책 10권’에 선정되는 등 화제를 모으며 즉시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러나 준은 책이 인기를 얻을수록 혹시나 자신의 비밀이 밝혀질까 봐 전전긍긍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중국인 이야기를 백인이 썼다는 이유로 악평 또한 늘어나는 가운데, 트위터에 준이 아테나의 작품을 훔쳤다는 폭로 글이 떠돌면서 준의 위기가 본격화한다.
창조와 표절, 예술의 상품화, 인종차별/역차별, SNS 문화전쟁에 관한 문제 제기
“범죄, 풍자, 공포, 편집증, 문화적 전유, 소셜미디어의 홍수까지…
그러나 무엇보다 엄청난 이야기다.” (스티븐 킹, 소설가)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특정한 주의/주장을 지지하고 내세우는 이슈 제기를 넘어 전복적인 역할 바꾸기 게임이자 사고실험이라는 데 있다. 중국계 작가인 쿠앙이 굳이 백인 여성 ‘빌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이기도 하다. 백인인 준이 중국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역사소설을 발표한 것이, 작가가 백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발표한 것과 아이러니하게 맞물린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더욱 흥미진진하고 깊이 있는 독법이 가능하다.
#문화적 전유 혹은 진정성
백인 여성이 중국의 민감하고 아픈 역사를 썼다는 이유로 준은 온라인상에서 엄청난 비난에 시달린다. 영화계의 ‘옐로페이스’와 마찬가지로, 펄 벅의 『대지』와 마찬가지로 문화적 전유/착취라는 것이다.(실제로 준은 백인 여성의 시각에서 아테나의 원고를 보편적 휴먼 드라마로 만들기 위해 중국 노동자들에 대한 유럽인의 인종차별 등 여러 부분을 각색했다.) 이에 대해 준은 반문한다. 그럼 아테나는 어떤가? 아테나는 한국인도 아니면서 한국전쟁을 다룬 소설을 써서 상을 받은 적도 있었다. 과연 역사를 이야기할 자격은 특정한 인종적/민족적/문화적 배경과 입장을 가진 사람에게만 있는 것인가? 작가는 작품을 쓸 때 자신의 경험만을 토대로 해야 하는가? 그뿐이 아니다. 아테나는 중국계라는 ‘다양성’을 어필하여 스타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아테나는 중국어도 잘 못할뿐더러 중국에 가본 적도 별로 없고 영국과 미국에서 서구식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그런 그녀가 아시아계 미국인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는 것이야말로 기만 아닌가?
#창조와 표절, 허구와 실재의 경계
준은 친구인 아테나의 초고를 몰래 가져다가 고쳐서 자신의 이름으로(아시아인을 연상시키는 이름로 바꿔서) 책을 출간한다. 그러나 이 원죄에 대한 죄책감을 희석시키기 위해 점차 자기합리화의 수렁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준은 초고라고 보기도 힘든 아테나의 미완성 원고를 대부분 뜯어고쳐서 각고의 노력 끝에 다이아몬드로 탈바꿈시켰다고 주장한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성당의 벽화를 미완성 상태의 어마어마한 덩어리로 남겨뒀다고 상상해보라. 라파엘로가 그걸 이어받아서 나머지 작업을 해야 했다면 어땠겠는가. (…) 책 표지에 내 이름이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뭐지?”(준이 원저자를 밝히고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준이 아니었다면 아테나의 그 조잡한 초안은 책이 되지 못한 채 창고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게다가 아테나는 어떤가? 아테나야말로 남의 이야기를 훔쳐 쓴 도둑이었다. 아테나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와의 인터뷰 내용은 물론이고 남자 친구와의 대화 내용, 심지어 친구인 준의 아픈 개인사마저 작품에 그대로 갖다 썼다. “아테나는 늘 자기가 한 건 상대에 대한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트라우마에서 정수를 뽑아내 영원한 것으로, 즉 ‘고통과 상처를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준다’는 것이었다.” 최근 몇 년간 한국문학계에서 여러 차례 벌어진 스캔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예술의 상품화
출판업계에서는 매력적이고 젊은, 게다가 ‘뭔가 조금 다른’ 작가를 찍어서 그에게 돈과 자원을 아낌없이 투자한다. 업계는 예일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인 데다 앤 해서웨이처럼 아름답고 게다가 유색인종이라는 희소성을 가진 아테나라는 상품을 선택했다. 그 결과 아테나는 시작부터 남다른 스타 작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준은 자신이 평범한 외모의 백인 여성이기 때문에(역차별) 아무리 열심히 쓰고 아무리 잘 써도 아테나 리우처럼 될 수 없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려왔다.(아테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