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한복판에서도 삶을 놓지 않는 인간의 존엄함!
로베르 앙텔므가 말하는 인간, 그리고 인류!!
여기에 내가 겪었던 것을 옮겨 적는다. 그곳의 공포는 거대한 것이 아니었다. 간더스하임에는 가스실도, 시체 소각장도 없었다. 그곳의 공포는 어둠, 지표의 절대적 부재, 고독, 끊이지 않는 억압, 점진적 소멸이었다. 우리 투쟁의 원동력은 끝까지 인간으로 남겠다는 필사적 요구, 그마저도 거의 언제나 고독한 필사적 요구였다. ― 머리말
역사 속에서 2차 세계대전은 매우 끔찍한 전쟁이었다. 일본에 떨어진 폭탄으로 인해 일본의 전후 세대들은 폭탄이 남긴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고, 전쟁이 끝난 후엔 냉전이 시작되어 실상 2차 대전은 오랫동안 끝나지 않는 전쟁이기도 했다. 전쟁 시 인간에 대한 학살은 꾸준히 실행되었으나, 2차 세계대전은 한 인간이 한 인종을 절멸시키기 위해 그 인종을 마구잡이로 포획해 수용소에서 죽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는 학살이라 표현하기도 어려운 끔찍한 범죄의 진행을 자신의 의무라고 규정짓던 사람들까지 있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나치가 절멸시키려던 것은 유태인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 한 인종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독일은 집시, 어린아이, 레지스탕스, 독일 내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까지 수용소에 가둬 놓고, 그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떨다 죽기만을 기다렸다(물론 아우슈비츠에선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만큼 죽음을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다루기도 했다). 수용소에서 어떤 이들은 죽었고, 어떤 이들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그 끔찍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린비출판사에서는 그 기록 중 하나,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미 유럽에서는 수용소 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인류』(L'Espece humaine)를, 로베르 앙텔므(Robert Antelme, 1917~1990)의 이야기를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노력해 온 고재정 선생의 번역으로 출간하였다.
로베르 앙텔므는 1943년 나치에 맞서 레지스탕스에 가담했고, 1944년 6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1945년 4월 다하우수용소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해방되기까지의 수용소 경험을 서술하였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후 앙텔므는 갈리마르출판사의 플레이아드 총서 편집에 종사하며,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일생을 보냈다. 알제리전쟁에 반대하는 「121인 선언」(1960년)과 68학생운동의 「학생-작가 행동위원회」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인류』는  ‘강제수용소 증언문학’ 가운데에서도 가장 초기(1947년 출간)작이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기록 중 하나로, 나아가서는 2차 대전 후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인류』를 관통하는  ‘단지 고통 속에 함께 있음으로서의 저항’, ‘타자에 대한 무한한 인정으로서의 우정’ 이라는 앙텔므의 생각은 모리스 블랑쇼, 자크 데리다, 장-뤽 낭시의 정치와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통해 현대 프랑스 철학에 영감을 제공했다. 특히 ‘호모 사케르’ 연작으로 유명한 조르조 아감벤도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서 프리모 레비와 함께 가장 중요한 ‘증언자’로 앙텔므를 들며 『인류』를 읽어 낸 바 있다.
인류 전반에 대한 깊은 통찰
‘인간은 누구나 다 인간이다’, ‘인류는 하나다’. 이 단순한 말 속에 담긴 고통과 피로, 분노와 혐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인정하는 인간 정신의 힘과 깊이를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인류』를 제대로 읽은 것이다. 앙텔므가 책의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인류』의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결론은 “모든 인간은 인류에 속하며 인류는 하나다”라는 단 하나의 주장이다. 이 주장이 단지 선언적인 것이라면 아무런 힘도 없으리라. 앙텔므는 수용소에 있는 동안 죽음에 노출된 채로 드러나는 신체의 변화를 세밀하게 서술한다. 열 달 동안의 그의 수용소 생활에 대한 묘사는 마치 스스로 실험을 하듯 적어내리는 생체 실험 일지와 같다. 그는 피험자인 동시에 관찰자이다. 또한 그 자신이 바로 수용소에서 한 인간에게 보여 준 실험 과정의 생생한 기록이기에 그가 겪었던 고통을 분리될 수 없는 결론으로 받아들일 때, 인류는 하나라는 그의 외침은 비로소 인류 전체의 의미와 힘을 얻게 된다. 
수많은 나치 강제수용소의 기록 가운데에서도 『인류』의 의미가 특별한 것은 그의 책이 수용소에 대한 증언에 머물지 않고 인간, 나아가 인류에 대한 깊은 통찰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한 그의 책이 ‘부헨발트수용소’, ‘간더스하임 코만도’, ‘죽음의 열차’ 혹은 ‘다하우 해방의 순간’ 등이 아니라 『인류』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 재구성된 수용소의 일상!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말하고 싶다는 열망, 말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말로 다할 수 없는 체험 사이의 간극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4월 29일, 다하우수용소를 ‘해방’시킨 미군 병사들은 그 기이한 참상 앞에서 “Frightful”을 연발했다. 그러나 ‘끔찍한’이라는 그 단어로 강제수용소의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러한 미군 병사들 앞에서 앙텔므는 이미 “어떤 무한하고 전달 불가능한 앎에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을 떠올린다. 현장을 목도한 상대에게도 어떻게 그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자칫 ‘끔찍한’, ‘상상 불가능한’ 등 “허공의 말을 방패삼아” 진실에 다가가지 않을 위험은 증언문학, 특히 강제수용소 증언문학이 자주 빠지는 함정이다. 이 ‘전달 불가능한’, ‘상상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체험을 전달하기 위해 『인류』는 우리에게 수용소를 ‘생각’하게 만든다. 가스실도 소각로도 없는 간더스하임 코만도의 경우 죽음은 수용소의 일상 속에, 추위와 굶주림, 구타와 노역, 그리고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 산재해 있다. 죽음에 이르도록 반복되는 그 일상적 위협들 ―시간, 노역, 구타, 굶주림, 추위―을 우리는 앙텔므의 시선을 통해서 보고, 그것들에 대해 성찰하는 앙텔므의 의식 속으로 함께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수용소의 일상은 ‘있는 그대로’에 가깝게 재구성되고 우리에게 전달된다. 
『인류』에는 마르고 굶주리는 몸과 그런 몸을 바라보는 의식에 대한 하루하루의 기록이 있다. 빵이 삼켜져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애타는 일인지,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얼마나 배고픈 일인지, 텅 빈 입과 텅 빈 위의 강박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인지, 추위와 노역이 어떻게 몸을 마모시키는지, 그 마모가 어떻게 돌이킬 길 없이 죽음을 향한 한 걸음 한 걸음을 의미하는지를 우리는 언어를 통해 체험하게 된다. 이렇게 실사에 가까운 수용소 일상의 재구성이 증언문학으로서 『인류』의 기본 자산이라면, 이미 앞서 강조한 수용소의 조직과 사회, 인간관계와 인간성에 대한 성찰은 『인류』에게 철학과 문학의 힘을 더해 준다.  
수용소 안의 죽음, 죽음에 대한 무례함
죽음의 일상화
누구 한 명이 죽는다. 그의 친구들은 그 사실을 더 특별하게 느끼겠지만, 이내 잊을 것이다. 소리 소문도 없고, 아무것도 멈추지 않는다. 그가 죽는다, 점호다. 그가 죽는다, 수프 시간이다. 그가 죽는다, 우리는 얻어맞는다. 그는 홀로 죽는다.(147쪽) 
수용소는 죽음과의 관계로 정의된다. 절멸수용소야 말할 것도 없지만 강제수용소 역시 핵심은 마찬가지다. 동물, 인간, 자연, 문명을 나누는 경계 어딘가에 죽음에 대한 태도가 있다. 두 달을 지낸 부헨발트수용소를 떠나면서 앙텔므는 그곳을 단적으로 이렇게 요약한다. “산 자들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죽음 앞에서는 무심한 세계”, “이곳에서 죽음은 매 순간 삶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부엌의 굴뚝 옆에서 나란히 시체 소각장의 굴뚝이 연기를 피워 올렸다. 우리들이 도착하기 전, 산 자들의 수프에 죽은 자들의 뼈가 들어 있었고, 죽은 자 입안의 금은 산 자의 빵과 교환되었다. 죽음은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