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국가의 크기가 아니라 인물의 크기로 싸운 사람들 위대한 패배자, 혹은 승자보다 더 사랑받는 패배자를 다룬 책이 나왔다. 제갈공명(제갈량)과, 로마공화정을 뒤흔들어놓은 한니발이 주인공이다. 그들의 내면과 시대상, 약 4백 년의 시차를 두고 고대 동양과 서양의 거대 세력에 맞서 ‘고군분투’한 두 사람의 행적을 한 권의 책으로 내놓았다. 제갈량이 활동하던 시대를 보면, “漢나라가 공식적으로 끝난 것은 헌제가 魏문제 조비에게 찬탈당한 220년의 일이지만, 실제 189년 헌제가 즉위할 무렵부터 제국의 틀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황건적의 난 발발(184년) 이래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의 병권을 강화시킨 것이 다시는 천자의 통제하에 돌아오지 않고 모두 군벌이 되어버렸다. 헌제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계속 군벌 간의 각축이 진행되어 220년경까지는 세 개의 강한 세력이 정립하는 상황이 되었다.”_《역사로 읽는 용비어천가》, 김성칠·김기협 공역, 389쪽, 〈평설〉 중에서 당시 삼국이 각각 완전한 통일체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삼국의 형성은 기존 군사세력의 이합집산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각각 제국을 선포한 뒤에도 그 내부구조 속에는 사병집단의 연합관계가 많이 들어 있었다. 관우가 오랫동안 荊州에서 독립된 위치를 갖고 있었던 점, 魏나라 명장 사마의(사마중달)의 후손이 魏나라를 찬탈하여 晋나라를 세우는 일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가토 도루(加藤徹) 교수의 견해가 흥미롭다. 그는 ‘남자’를 뜻하는 男(남), 漢(한), 士(사), 俠(협)의 예를 들며 男은 女의 상대로서 남자, 漢은 땀과 피를 흘리는 뜨거운 남자, 士는 높은 뜻을 품은 사대부의 남자, 俠은 신의를 위해 목숨도 태연히 버리는 남자라면서, 사서 <삼국지>와 소설 <삼국연의>가 재미있는 것은 漢·士·俠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중 최고의 ‘협’으로 유비를, 이상적인 ‘사’로 제갈공명을 꼽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중국인은 역사에서 美學을 찾는데, 천하쟁탈전에서 이기더라도 왕조의 수명은 2백여 년에 불과할 뿐이지만 역사라는 캔버스에 그려진 義의 미학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유비와 공명은 죽을 때까지 완고하게 자신의 미학에 얽매인 인물이었다. 유비는 蜀 땅에 웅거한 뒤에도 俠의 용병 정신을 유지했고, 공명은 사대부로 士의 미학을 관철시켰다. 유비와 공명은 최고의 俠과 士의 조합이었으며, 이는 후세만이 아니라 동시대 상대국 사람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이 책은 이러한 시각을 담고 있다. 용병대장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유비를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고 그 아들 유선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오장원 진중에서 죽은 공명은, 싫든 좋든 사대부의 전범이었다. 그러나 사람 보는 눈이 약할 때도 있었다. 지나치게 이론으로 치닫는 마속에게 군사를 맡겨 실패하고는 그 목을 베어야 할 처지에 빠진 것이 단적인 예이다(읍참마속[泣斬馬謖]). 책에서는, 조운(조자룡)의 무거운 충고를 들어야 하는 공명의 절박한 처지를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행정가로서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다. 漢고조 유방을 보좌한 공신들 가운데 보급을 책임진 소하의 역량을 높게 평가하듯, 천재 전략가라는 타이틀에 가려져 있던 공명의 국가 경영능력을 포착해 서술했다. 천연가스로 소금을 제조하고, 광산을 개발하여 철을 제련했으며, 비단[蜀錦]을 전략상품으로 특화시켜 적국인 魏나 吳나라 외에도 서방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세금 관리도 잘 해 조세 저항도 거의 없었다. 관우를 잃은 유비의 ‘이상한 선택’으로 나라가 엉망이 되었음에도 이를 수습하고, 소국[蜀漢]이 대국[魏]을 겨냥해 다섯 차례나 북벌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도 경제력이 탄탄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출사표>라는 名文을 통해 대의를 천하에 보이고 후세에 蜀漢 정통론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사대부로서의 문장력이 그의 진가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공명의 라이벌 사마의는 그의 ‘숨은 팬’이었고 그의 손자 晋무제(사마염)도 공명을 존경해 옛 적국이었던 蜀 출신의 진수(陳壽)를 <삼국지>의 편찬자로 발탁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래서인지 후세의 중국인들은 일개 지방정권으로 끝난 蜀漢 멤버들을 삼국지 이야기의 주역으로 올려놓았다. 제갈공명을 칭송한 문사들은 매우 많다. 책에서는, 일본 작가 도이 반스이(土井晩翠)의 의 일부와 이순신 장군의 시를 소개했다. 특히 얼마 전에 발굴된, 한산도 해전 직후에 쓴 것이라 추정되는 장군의 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으니, 이 한 몸 죽음으로 임금의 은혜를 갚으리라”(當存亡之秋 一死報君恩)에 나오는 ‘존망지추’는 공명의 <출사표>에 나오는 구절이기도 하다. 두 영웅은 묘하게도 47세에 전장에 나섰으며(임진왜란 개시/ 북벌 개시), 54세 때 마지막 전투에서 세상을 떠났고,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페니키아와 카르타고와 로마, 그리고 한니발 기원전 10세기경 역사에 등장하는 페니키아는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하고 알파벳 문자를 개발했다. 지중해 동부, 현재의 레바논 땅에 시돈과 티레라는 거점도시를 마련하고 정기적으로 배를 띄웠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거류지라고 부르는 무역기지를 세웠는데 훗날 카디스나 마르세유 같은 현대 도시의 기초가 되었다. 카르타고도 그중 하나였다. 현재의 튀니지에 위치한 카르타고는 이상적인 지리적 특성 때문에 급속도로 부유해졌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이 티레를 멸망시키자 카르타고는 본국과의 관계를 끊고 독립국가로서 셈족의 서부 전진기지가 되었다. 아프리카 연안의 대부분, 프랑스의 일부, 스페인 등이 카르타고의 속령이 되었고 주석, 염료, 백향목, 노예무역을 독점했다. 거기에는 첨단의 배가 있었다. 이 배로 지브롤터해협을 지나 영국 콘월에 이르고, 발트 해까지 진출했다. “우선 그들은 전투 전용으로 쓰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배를 개발했다. (…) 그들은 길이가 매우 길고 폭이 좁은 배를 건조했다. 그들의 배는 이웃 지역의 사람들이 넓은 강가를 따라 천천히 노를 저었던 통 모양의 배보다는 훨씬 빨랐다. (…) 그들은 가로돛을 고수했지만 배의 안정성을 높이고 조종을 좀더 용이하게 하기 위해 때때로 배 앞부분에 작은 돛대를 세우기도 했다. 그들은 닻도 능숙하게 사용했던 것 같다.”_《배 이야기》, H. W. 반 룬 저/ 이덕열 역, 49∼50, 53쪽 그런데 카르타고인의 항해 거리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 같다. “(우리는) 카르타고 사람들이 지브롤터에서 9천 km 아래인 아프리카 서쪽 해안 블랑코 곶까지 탐험하여 그 지역에 무역기지 몇 군데를 설치했으며, 포르투갈인이 나타나기 1700년 전에 케이프베르데 제도를 발견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_위의 책, 52쪽 이런 먼 거리 항해에 물과 음식을 어떻게 조달했는지 알고 나면 카르타고인의 강인한 의지를 느끼게 된다. 그들은 “일상적인 욕구에서 대단히 금욕적”이었으며 “대추야자나 건포도 한 줌이면 일반 뱃사람이 24시간 동안 버티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지중해 동쪽의 도자기 제조 기술 덕분에 그들은 마실 물을 담는 그릇을 가질 수 있었다.”(위의 책, 54쪽) 카르타고를 지배하는 귀족들은 해외파와 국내파로 분열되었다. 적극적인 해외 진출파의 리더가 한니발 가문이었다. 카르타고의 정치제도는 제법 훌륭했던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카르타고에서는 훌륭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며 “집정관이 같은 가문 혹은 특정 가문에서 배출되는 것이 아니”고 “세도 가문이 있다 해도 나이로 뽑는 것이 아니라 선거에 의해 선출”했다고 《정치학》에 적었다. 그러나 약점이 있었다. 후대의 베네치아공화국과 비슷해 보이는 카르타고의 제도적 약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