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2017년 대한민국,
기본은 갖춘 사회로 만들자면?!
한국의 20세~34세 청년들에게 “바라는 미래상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가장 많은 답변은 ‘붕괴, 그리고 새로운 시작’(42%)이었다(2015년, KIST 연구팀의 설문조사). 차라리 다 망해버리는 걸 택할 정도로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감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는 경고음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가 더한 파국으로 치닫지 않으리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에 10년 전만 해도 몽상가들의 아이디어 정도로 치부되던 기본소득이 ‘기회 재장전’의 희망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취지는 좋은데 비현실적이다” “발상은 훌륭하나 재원 마련이 어렵다”는 등의 생각이 기본소득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가로막고 있다. 그런 반박이나 의구심은 얼핏 ‘돈 문제’만 해결되면 기본소득을 못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투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적어도 절대빈곤은 벗어난 사회가 사용 가능한 재원을 어떤 필요에 따라 분배할 것이냐의 문제이지, 없는 재원을 새로 창출해내야 하는 문제일까? 어쩌면 노동 없이 주어지는 소득에 대한 본원적 거부감의 문제는 아닐까? 더 나아가, 기본소득이라는 ‘전혀 새로운’ 발상이 요구될 만큼 우리 현실이 얼마나 절박한가에 대한 실감과 이해의 정도 차이에서 비롯되는 건 아닐까?
기본소득, 왜 절박해졌을까?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기본소득이 여기저기서 떠들어지게 되었을까? 저자는 크게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알파고’로 상징되는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한 일자리 감소 문제다. 이 책에 따르면 “옥스퍼드대 연구자들은 앞으로 20년 내에 미국에서만 일자리 47%가, 유럽에서는 일자리 54%가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둘째, 경제성장률의 저하와 양극화다. 성장 자체가 저조한 상태인데, 그마저도 ‘고용 없는 성장’이다. 게다가 그 성장 과실조차 소수에게 집중되는, 역사상 유례없는 불평등 세상을 맞이하고 있다. 셋째, 현행 복지 시스템의 붕괴다. 안정적인 소득을 가진 정규직 노동자가 다수고, 복지 대상자가 소수일 때나 잘 돌아가는 복지 시스템이 이제 한계에 부딪쳤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노동시장에서 충분한 소득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다 보니 복지 대상자를 선별하는 데 쓰는 비용은 점점 더 늘며, 혜택을 받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도 더 커진다. 비용은 비용대로 더 드는데 효과는 없는 것이다.
결국 ‘일자리 감소’라는 필연적 현재와 미래에 대한 특단의 대안으로 기본소득이 불려나오게 됐단 얘기다.
아인슈타인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과거와 같은 경제성장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더 이상 경제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에 매달려 있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본소득 도입을 절박하게 요청하는 것이다. 심각한 불평등을 해소하고, 대량 실업의 위협으로부터 인간의 삶을 보호하며, 기술 진보에 벌벌 떠는 대신 그것을 인류에 봉사하는 수단으로 삼으려면 그 어느 때보다 기본소득이 절실하다. -43쪽
기본소득 불가론의 근거는 타당한가?
사람들은 흔히 “공짜로 돈을 주면 사람들이 게을러지고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실제로 기본소득을 지급했을 때 사람들이 노동을 그만두지 않았던 사례로써 간단히 반박된다. 2008~2009년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마을 주민 930명에게 최저생계비 1/4 정도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실험한 결과, 극빈자 비율은 80%에서 40%로 절반가량 줄고 실업률도 60%에서 45%로 감소했다. 기본소득을 밑천으로 소규모 자영업을 시작한 주민들도 생겨났다. 인도에서도 2011~2013년 마을 주민 6000여 명을 대상으로 2년간 기본소득을 정기적으로 지급해본 결과는 역시 긍정적이었다. 기본소득을 받은 가구 중 21%는 소득이 전보다 늘었고, 많은 가구가 악성 채무에서 벗어났다. 소작농과 불안정 임노동자의 처지를 오가던 사람들이 전업 자영농민으로 변모하는 비율도 높았다.
이런 긍정적 효과는 저개발국이나 개발도상국에서만 나타난 게 아니다. 1973년 3월, 캐나다 정부는 주민 약 1만3000명의 더핀 마을 1300여 가구에게 각각 해마다 3300달러(4인 가족 기준. 지금 가치로 약 1500만 원)를 지급하는 ‘민컴 프로젝트’를 4년간 실시했었다. 이로 인해 범죄율이 42% 감소했고, 자가주택 비율은 4~6% 증가했다. 또 주민의 병원 입원율이 8.5% 감소했는데 특히 정신과 치료가 눈에 띄게 줄었다. 노동시간 감소는 남성이 약 1%, 기혼여성이 약 3% 그리고 미혼 여성은 5% 정도 줄어드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렇듯 기본소득을 주면 사람들이 게을러지리란 우려에는 근거가 없다.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더 열심히 일하도록 사람들을 자극하고 격려하는 마중물이 되기도 했다. 기본소득을 받게 된 사람들은 더 장기적인 미래를 설계했고, 그들의 삶은 조금씩 개선되어나갔다. 기본소득으로 인해 새로운 희망을 얻은 것이다.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본소득 실험들은 기본소득의 긍정적 효과를 거듭 확인해준다.
기본소득, 당당히 요구하자!
한편으로 저자는 사회의 부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누구도 진공 상태에서 생산물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제까지 축적된 기술과 유형?무형의 사회적 지원 위에서 생산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생산물은 협업의 산물이고, 이 협업에 참여하는 사람은 아주 다양하다. 이는 실리콘벨리의 IT사업가들이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은 인류 다수의 집단지성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생산하는 부를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협업은 다양한 생산 행위 사이에, 과거 노동과 현재 노동 사이에, 생산과 재생산 사이에, 생산 행위와 수많은 사회적·문화적 활동 사이에 진행된다.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허버트 사이먼은 우리 스스로 무언가를 생산한다는 믿음이 환상임을 지적한다. 사이먼에 따르면 우리가 ‘스스로 벌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기껏해야 소득 중 5분의 1이다. “나머지는 엄청나게 생산성이 높은 사회에 속한 덕분에 세습한 재산이다. -162쪽
이렇게 본다면, 기본소득은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시혜가 아니다. 오히려 마땅히 받아야 할 권리가 된다. “기본소득은 기술혁신 과정에서 낙오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대책이 아니다. 반대로 기술혁신에 기여한 모든 인류에게 정당한 몫을 돌려주자는 것이다”.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논거는 ‘도덕적 해이’론이다. 즉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돈을 주는 건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것이다. 저자는 두 가지 관점에서 노동윤리에 대한 이런 믿음을 공박한다.
첫째, 생산력이 부족한 시대에 노동자들을 더 열심히 일하게끔 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동윤리는 지금 시대에는 안 맞다는 점이다. 공급이 언제나 수요에 비해 부족했던 과거에는 많이 일할수록 사회는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생산력은 수요를 훌쩍 넘어서며, 인간 없이도 생산이 이루어진다.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또 모두가 일하지 않아도 사회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 이렇게 사회가 바뀌었는데도,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지켜야 할까?
둘째, ‘임금노동’만을 ‘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울의 말은, 기독교공동체의 신자들이 곧 신의 심판과 세계의 종말이 찾아올 것이라 믿고 일상생활을 내팽개치는 모습을 우려해서 나온 것이었다. ‘일해서 돈 벌어라’는 말이 아니라 ‘삶에 충실해라’는 말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임금노동은 삶의 일부일 뿐, 우리는 임금노동 말고도 다른 많은 일(또는 활동)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