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시대부터 차이잉원 시대까지
한 권으로 끝내는 타이완의 역사
2017 타이완 문화부 선정, ‘제39회 초중고 청소년 우수 추천 도서’
학생들의 간단한 질문에도 머뭇거리는 저를 발견하면서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컨대 청나라는 타이완을 점령했는데 왜 명나라는 타이완을 점령하지 않았나요? 청나라 때 타이완 사회에서는 반란이 자주 있었나요? 황민화 운동 당시 타이완인들은 일본인에 완전히 동화되었나요? 장징궈는 민주화의 원동력이었나요? 학생들의 이런 단순한 질문 속에는 사실 심오하고 복잡한 배경이 담겨 있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는 문제입니다. _궈팅위, 서문1
가깝고도 먼 나라, 한때 공산 중국과 대조되어 ‘자유중국’이라 불렸던 나라, 대사관이 아니라 영사관(대표부)을 두는 나라, 한국 젊은 층 사이에 여행 붐을 일으킨 나라, 중국의 활기와 일본의 깔끔함을 겸비한 나라, 작지만 자연 풍광이 볼만한 나라, 반도체로 한국과 경쟁하는 나라, 미국을 뒷배로 시진핑 중국과 각을 세우며 일촉즉발의 국제정치적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나라.
바로 타이완이다. 인구가 한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국토는 경상남북도를 합친 크기에 불과하지만, 타이완의 존재감은 날로 커지고 있다.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 합법화를 실현했으며, 해커 출신의 30대 여성을 디지털 특임장관으로 임명한 나라, 해바라기 운동 등으로 시민민주주의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중인 타이완은 미·중 패권 경쟁이 남중국해로 옮겨지면서 미국 중심 세계질서의 리트머스 시험지로도 점점 부각되고 있다.
우리는 타이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알고 보면 한국과 비슷한 현대사 경로를 밟아온 타이완은 일본 식민지를 겪었으며, 독재정부의 압권을 경험하며 저항적인 자생적 민주주의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일본에 대해 갖는 태도가 한국과는 다르고, 여러 측면에서 비교해볼 점이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이러한 타이완의 역사와 현실을 한권으로 꿴 책이 출간되었다. 타이완의 젊은 역사학자들이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한눈에 읽을 수 있게 풍부한 도판과 함께 해설한 『도해 타이완사』가 그것이다. 2016년 출간돼 타이완 문화부 ‘우수 추천 도서’로 선정된 이 책은 이데올로기로 인해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타이완 역사의 베일을 벗기고 그 실체를 남김없이 보여준다. 2016년은 타이완에서 의미가 남다른 해다. 오랜 국민당 집권에서 벗어나 민진당의 차이잉원이 총통이 되면서 새 시대가 열렸다. 이해에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청년을 위한 새로운 타이완 역사 강의’라는 헤드라인을 달고 출간된 『도해 타이완사』는 명실상부 새 시대에 발맞춰 타이완의 역사를 새롭게 파헤치고 해석한 역사서라 할 수 있다. 사용하는 용어와 개념부터 특정 이데올로기에 편중되는 것을 경계했으며, 역사적 사건의 나열보다는 그 안에 숨은 맥락을 공정하게 밝히는 데 주안을 두었다. 이번에 한국에 번역된 이 책은 그간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던 타이완의 역사를 대중적으로 폭넓게 다룬 첫 번째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채로운 도판과 한눈에 알아보는 설명
이 책은 통사다. 선사시대부터 수천 년의 역사를 한 권에 녹여낼 수 있었던 비결은 사료, 지도, 그림을 시각적 정보로 인포그래픽화 하여 구현했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대인 저자들은 지도나 사진뿐만 아니라 주요 시대, 사건, 인물, 장소를 키워드화 하여 따로 정리함으로써 타이완 역사를 폭넓게 구석구석 정리하고, 역사 상식을 유기적으로 축적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섬, 포르모사
타이완은 16세기 중반 우연히 지나가던 포르투갈 선원이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일랴 포르모사Ilha Formosa’라고 외친 경우를 제외하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섬이었다.
15세기 무렵 베네치아공화국과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전쟁으로 육상 교역로인 실크로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서양은 이를 대체할 루트를 찾아야 했다. 원거리 항해에 관한 기술이 충분히 발전했던 유럽은 그렇게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한편 당시 명나라는 일곱 차례에 걸친 대원정을 떠날 정도로 충분히 원거리 항해가 가능했다. 하지만 북방의 강적인 몽골과 대적하는 데 주력해야 했기에 항해 금지령인 해금 정책을 내릴 정도로 정작 타이완에는 눈길을 줄 틈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훗날 명나라의 조정이 해이해지면서 해금 정책도 덩달아 유명무실해지면서 일본의 해적과 상인들이 남쪽 연안 지역에서 무역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타이완은 명나라가 사려 깊게 보살핀 섬은 아니었지만 동시에 그런 이유로 많은 국가가 거쳐갈 수 있는 섬이 된 것이다. 태평양 가운데의 외딴섬에 불과했던 타이완은 해상 각축의 시대에 자연스럽게 동서양 열강의 주요 지점으로 부상하게 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스페인의 상업 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1662년까지 39년간 타이완을 통치한다. 짧은 통치기간 동안 네덜란드가 남기고 간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지금까지도 타이완 곳곳에서 재배되는 벼와 사탕수수가 대표적인 지배의 흔적이다.
3년에 한 번 반란, 5년에 한 번 대란
청나라가 타이완을 통치하는 212년간 타이완에서는 크고 작은 난이 154차례나 일어났다. 3년에 한 번 반란이 일어나고, 5년에 한 번 대란이 일어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혼란의 시기였다. 베이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데다 거친 해류와 풍랑으로 인해 접근성마저 떨어져 청나라에게 타이완은 변방일 뿐이었다. 중앙 조정의 시야 밖에 있던 타이완의 반란은 이익 집단 간의 다툼과 반정부 대립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를 한족의 반청복명反淸復明 행위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대부분이 정부의 부적절한 조치에 불만을 품고 민란을 일으키는 경우였으며 또한 모든 민란이 청나라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런 대규모 민란으로 ‘의민義民(민란을 평정하는 데 도움을 준 자들의 신분)’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의민의 대표 주자는 객가인(고향을 떠나 이주한 한족을 지칭)인데, 한편 객가인을 반청복명을 위한 정의로운 행동을 한 집단, 혹은 청나라 정부를 도와 민란을 평정한 의롭지 못한 백성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었다. 하지만 객가인은 민난인에 비해 인구가 적고 제도적인 측면에서 불리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견해는 적절치 않다. 이들은 안팎으로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단결력을 보여주며 강한 생존본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부의 부름에 묵묵히 따르면서 정부로부터 의민이라는 봉호를 하사받을 정도로 각고의 노력 끝에 ‘의민=객가인’이라는 인식이 심어지게 된 것이다.
이주민과 개항의 시대
17세기 후반부터 중국 남부의 푸젠과 광둥성의 급격한 인구 증가로 그곳의 많은 사람들이 타이완으로 이주했다. 타이완의 기후는 논농사에 적합했기 때문에 이주민들은 18세기부터 논농사를 지었다. 그러면서 더불어 쌀 생산량이 크게 증가해 인구도 늘었다.
청나라 시기에 타이완은 농경지가 개간되고 항구의 운송 네트워크도 정비되어 농업 자재와 일용품을 교환하는 체제가 형성될 수 있었다. 과거에는 대외 무역이 발달했다면 청나라 시대에는 청나라 대륙 지역이 주요 무역 대상으로 바뀌면서 타이완 해협을 왕래하는 화물 범선들이 크게 늘었다. 이에 따라 타이완에 여러 항구가 개발되었는데 예를 들면 하천항인 중부의 루강과 북부의 멍자艋舺 인근 지역에서는 쌀・장뇌・찻잎이 생산되어 ‘이푸얼루싼멍자一府二鹿三艋舺’(1푸청, 2루강, 3멍자) 라 불리는 항구 거리가 생겨났다. 뒤이어 1842년 청나라가 무역항을 개방하면서 차, 설탕, 장뇌(녹나무를 증류하여 얻는 고체 물질로서 화약과 방충제의 원료)가 타이완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근현대 최대의 비극
이 책은 1장부터 3장까지 각각 ‘선사 시대’ ‘해상 각축의 시대’ ‘청나라 시대’로 이뤄져 있다. 뒤이어 4, 5장에서는 189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