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사람 시인선 17
정덕재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출간
정덕재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가 출간되었다.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일상을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상실감, 자본주의의 일상화된 풍경, 점차 문명화되어 가는 사람들의 욕망의 의지를 위트 있게 써 나간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뒷전으로 밀려 나가는 중년의 삶을 재치 있게 다루고 있다.
중년의 나이와 외모에서부터 풍기는 즉물적 이미지, 일상의 사소한 에피소드(멸치를 보며 소멸을 생각한다던가 음주를 하지 못할 때 느끼는 감정들, 장례식장에서의 경험) 등으로 시를 쓰는 그는 어떤 대단한 것에서 시를 찾지 않는다. 그리고 시가 그렇듯 깨달음과 삶의 태도 또한 엄숙주의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 그에게 시는 일상이며 일상은 시이다.
인간의 세상살이가 아주 익숙한 일상에서 고통과 슬픔이 솟아나고 그것 때문에 또한 기쁜 일이 생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머 뒤에는 자본주의의 속성이 매 순간 일상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러한 자본주의적 삶을 폭로하는 방법론으로 위트와 재치가 쓰이기도 하다. 시인은 중심에 있는 풍경보다는 주변에 머물러 있는 풍경, 조명받는 화제보다는 비껴나 있는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다. 정덕재 시이은 ‘시인이 지녀야 할 시선의 덕목으로 밝음보다는 어둠, 그리고 어둠 속 그늘을 들여다보는 눈’이라고 말한다.
손미 시인은 추천사를 통해 “삶이라는 병이 살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현실을, 먹고사는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제물로 주고 그는 쓴다. 아프고 환한 세상의 양면을 정면으로 관통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시니컬하고 아직 따뜻하다.”라고 말하며 그의 시가 가진 병과 삶의 의지를 관통하는 아이러니에 주목했다.
해설을 쓴 김병호 시인은 ‘그의 시가 장난스럽게 다루고 있는 병과 생활인의 모습들은 단순한 장난기가 아니라 실체적 위기에서 발로한 것’이라고 말한다.
“저녁에 퇴근하자마자/아침에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는/혈압계를 찾”으며 “격정의 피를/달래면 달랠수록/고름의 피는 썩어간다”고 느낀다. 다음 순간 “심장은 요동치며” “살아 있는 모두가 환자”라고 소리 지른다. 이런 느낌은 위악일까? “밥을 먹으면/배가 부른 게 아니라 턱이 아프”고 자신이 쓴 시가 “동맥경화에 걸린 문장과/고지혈증에 걸린 낱말과/분노수치가 높아지는 고혈압의 수식어”로 다가온다면, 자신의 삶이 “지병과 같은 악행이 거듭되고 있다는 걸/나만 모르고 있었다.”
- 김병호 시인의 해설 부분
시집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는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는 선악의 감정들, 생활의 많은 부분들이 양가적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것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려는 그의 시들은 일상에 매몰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웃게 만들며 웃음 속에 쓰라린 페이소스를 숨겨놓았다.
시인은 간밤에 많은 이들이 악인이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렇다고 밤에 악인이었던 이가 낮에 선인이 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늘 경계의 외줄타기를 하는 많은 삶들이 ‘선인 속 악인’의 모습이 아닐까. 어수선한 시대에 정덕재 시인의 시집을 펼쳐놓고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