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청 제국 시기 ‘정치-문화적 중화제국’의 일부였는가?
왕위안충이 던지는 새로운 질문에 대해 깊이 읽고, 토론하며
한중 관계와 한반도의 미래를 성찰하자
1894년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세계의 오랜 중국적 질서의 와해와 근대 국가를 향한 갈림길이었다. 이듬해 청일 사이에 체결된「시모노세키」조약 1조는 “중국은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독립과 자주를 확실히 인정한다.”라고 명시했다. 조선이 그동안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것인가? 비록 생존을 위해 중국에‘사대’를 했을지는 몰라도,‘중국의 일부’였다는 조약의 첫 문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역사적으로 중국에게 한국은 무엇이었고, 한국에게 중국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은 청 제국에 무엇이었나_1616~1911 한중 관계와 조선 모델』(원제: Remaking the Chinese Empire: Manchu-Korea Relations, 1616~1911)은 17세기 초에서 20세기 초까지 정치와 외교사를 들여다보며 청이 중화제국을 다시 만드는데 조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핵심 개념으로‘조공’이란 용어를 대신하여 다소 생소한 ‘종번’과 그 체제를 있게 한‘조선 모델’을 제기하며, 양국이 종번이라는 밀접한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어떤 중대한 변화를 어떻게 겪었는지 밝힌다. 청과 조선의 관계사라는 미시사를 토대로 3세기 동안 이루어진 중화제국의 부상과 붕괴, 대외관계 시스템과 서양의 충돌, 동아시아에서 근대 주권 국가의 탄생 등 중국과 동아시아의 전환에 대한 거시사를 들려준다. 김종학 교수(서울대 외교학과)는 “이 책의 핵심개념인 ‘종번주의’는 한국사 내러티브에 익숙한 독자에겐 다소 불편한 것이지만, 그동안 미처 인식하지 못한 조청 관계의 중요한 일면을 깊이 생각하게 한다.”고 평가했다.
이전의 한중 관계를 다룬 논저들이 하나같이 양국 관계에 중점을 둔 것과 달리, 이 책은 양국 관계를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수 세기 동안 중국과 세계의 변화와 그로 인한 주변 국가와 지역에 미친 영향을 입체적으로 다룬다는 점이 특징이다. 계승범 교수(서강대 사학과)가 “제국 질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여유가 있고, 토론 거리가 넘치는 책”이라 평한 이유이다.
왕위안충(미국 델라웨어대 역사학과 교수)은 쑹녠선(중국 칭화대 역사학과 교수) 등과 함께 서구에서 글로벌 히스토리 방법론을 흡수하고 동아시아 역사담론의 세련된 수사를 구사하며 떠오른 역사학자이다. 이 책은 한중 관계에 관한 미국학계의 주목할 만한 최신 연구로 꼽힌다. 왕위안충이 던지는 새로운 질문‘한국은 중국에 무엇인가?’는 ‘중국은 한국에 무엇인가?’에 매몰된 우리에게 그 이면을 생각해보고 한중 관계와 한반도의 미래를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핵심개념 ‘종번 체제’와 ‘조선 모델’을 제기하다
이 책은 정치와 외교의 시각에서 청대 중국사에서 조선왕조의 중요한 역할을 분석한다. 책의 전반부는 입관 전 청이 조선과 종번 관계를 맺어 자국의 ‘중국’인식을 구축하는 과정과 입관 이후 ‘조선 모델’을 광범위하게 운용하여 다원적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을 고찰했다. 후반부는 19세기 후반, 청대 중국이 조선왕조와 관계를 조정하여 점차 서구 국제법의 정의에 따라 명확한 영토 경계를 갖춘 주권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일반적으로 명청 교체는 1644년 만주족이 북경을 점령한 때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왕위안충은 1637년 청-조선 종번 관계의 수립을 청 제국사에서 전환점이 된 중대한 사건으로 본다.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공한 청은, 1637년 초, 명의 가부장적 지위를 대신하여 조선과 종번 관계를 맺었다. 조선에 무력행사를 한 뒤 북경에 들어가기까지 10년이 향후 청이 중화제국을 다시 만드는데 가장 결정적 순간이었다며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개념인 ‘종번 체제’와 ‘조선 모델’을 제기한다.
종번 체제는 동아시아에서 ‘천하’라는 아주 오래된 세계질서를 뜻하는 것으로, 전근대 시기 한중 관계의 근간을 이뤘으며, 조공과 책봉의 수단과 ‘사대’와 ‘자소’의 언설로 구축되었다. 한반도의 왕조는 중원왕조와 유교적 세계관에 기반하여 독특한 문화적 동질성을 형성해 왔는데, 이 종번 관계는 명대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더욱 강화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저자가 만주족의 청이 명-조선 관계를 답습한 것이 아니라 주동적으로 활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조선의 변방에서 흥기한 오랑캐 청은 ‘화이지변’이라는 정치-문화적 환경 속에서 정통성을 입증해야 하는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했다. 청의 만주 정권은 입관 전 10년 동안 종번 구조에 내재된 정치-문화적 담론을 활용하여 ‘중국’의 지위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1637년 5월 13일, 조선이 성경에 첫 사행단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1643년까지 조선은 56차례, 청은 12차례 사신을 보냈다. 이 집중적인 사신 왕래는 청의 지위 변화를 일으키며 양자 간 새로운 정치 제도를 강화하고, 또 새로 정복하거나 예속된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관리할 성숙한 모델 개발로 이어졌다. 왕위안충은 이를 ‘조선 모델’로 정의한다. 이 모델은 다른 국가나 정치체가 조선을 따라 청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청의 연호와 역법을 채택하며, 청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해 조공하면서 청 중심의 종번체제 안으로 들어오도록 만들었다. 이 모델의 이면에는 조선을 통해 청이 문명국인 ‘중국’이자 천하의 중심인 ‘천조’라는 정체성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다.
청의 중화제국은 ‘영토적 제국’이 아닌
조선 모델을 통해 새로이 구축된 ‘정치-문화적 제국’
1644년 이후 서쪽으로 진격한 청은 18세기까지 몽골, 티베트, 신장 위구르를 내번화하고, 외지의 안남, 유구, 남장, 섬라, 소록, 면전을 외번화 하는 등 유라시아 제국 내외부에 새로운 제국 질서를 구축했다. 저자는 이 대외 관계의 모델을 청과 조선과의 관계, ‘조선 모델’이라고 칭한다.
‘조선 모델’은 의례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공물은 정치적 종속의 상징에 불과했다. 실제 1730년대 말 조선의 공물은 1630년대 말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청은 원의 공격적인 식민 정책 대신 명의 종번 기제를 배워 정교하고 뚜렷한 유교적 조선 모델을 활용해 국경의 안정을 유지하고 국경을 넘어 새로운 중화제국을 건설했다.
조선이 청에 사신을 파견한 빈도는 다른 어느 국가보다 높았다. 1637년부터 1894년까지 조선은 26가지 다른 목적을 위해 698회 사신단을 보냈다. 이는 연평균 2.71회로, 격년(유구), 3년(섬라), 4년(안남), 5년(소록), 10년(남장, 면전)에 1회 파견한 다른 조공국에 비교가 안 되는 수치였다. 연회에서 최고 수준의 ‘고두’는 세세하게 규정되고 엄격하게 실시되었고, 모든 의례는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정체성을 강화하는데 일조했다. 1675년 2월 9일 원소절 때 조선 사신이 러시아, 칼카, 오이라트 사신보다 앞서 강희제에게 하례를 올린 것처럼 황제에게 올리는 의식 거행에서 조선은 외번의 대표였다. 전형으로서 조선의 역할은 18세기 후반 건륭 연간에 두드러졌는데 이때 제작된 『황청직동도』에서 조선은 다시 한번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어 조선 관원 그림이 첫 번째 실렸다.
18세기 말, 주변국과 만주, 몽골초원에서 투르키스탄과 히말라야에 이르는 청의 팽창을 제국주의로 보는 서구 학계의 ‘신청사’ 연구를 반박하며 왕위안충은 청은‘영토적 제국’이 아니라 조선 모델을 통해 새로이 구축된‘정치-문화적 제국’이라 주장한다. 다시 말해 청의 행위는 제국주의가 아닌 종번주의에 의한 것이라며 청 초에 형성된 청-조선 관계의 지속성을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의 중요한 개념인 ‘종번주의’란 배타적인 문화 중심인 정치체와 덜 문명화되었거나 야만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주변이 정치, 외교 교섭 및 교류를 하는 중국적 시스템으로 종은 번에 대해 절대적인 가부장적 권위를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