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미로를 종횡무진하며 현대 환상 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거장
존재의 본질, 우주와 시간에 대한 깊은 사색이 담긴 칼비노의 대표적 철학 소설
『캉디드』에 비견되는 이탈로 칼비노 문학 세계의 최종판 『팔로마르』
국내 정식 계약 초역판 출간
이탈로 칼비노의 대표적 후기 작품 『팔로마르』가 민음사 이탈로 칼비노 전집 마지막 권으로 선보인다. 이탈로 칼비노는 1947년 레지스탕스 경험을 토대로 한 네오리얼리즘 소설 『거미집 속의 오솔길』을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해 초기에는 파시즘 치하에서 참여적이고 논쟁적인 작품들을 썼다. 이후 『반쪼가리 자작』, 『나무 위의 남작』, 『존재하지 않는 기사』로 이루어진 ‘우리의 선조들’ 3부작과 같은 환상과 알레고리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 그리고 『우주 만화』와 같이 과학적인 환상성을 띤 작품을 발표하면서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한편 『마르코발도 혹은 도시의 사계절』, 『힘겨운 사랑』처럼 현실과 현실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사실적인 작품들도 집필했다. 『팔로마르』는 이러한 칼비노의 다양한 시도들이 종합적으로 드러난 칼비노 문학 세계의 최종판이라 할 수 있는 작품으로, 볼테르의 유명한 철학 소설 『캉디드』를 연상케 하는 내용으로 독자의 흥미를 이끈다.
주인공 팔로마르의 이름은 천문대가 있는 캘리포니아의 팔로마 산에서 따온 것이다. 천문대의 주요 기능이 천체의 관찰에 있는 것처럼 그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관찰한다. 지엽적이거나 사소하게 보이는 것까지 섬세하고 예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자세하게 묘사하며, 거기에서 흥미로운 철학적 사색과 추론, 성찰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이런 관찰과 사색을 통해 칼비노는 현실과 삶의 다양한 측면들로 독자를 안내한다.
줄거리
칼비노는 한 글쓰기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그것은 ‘모홀’이라는 인물과 ‘팔로마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철학 작품으로, 팔로마르는 유명한 천문대가 있는 캘리포니아의 팔로마 산에서, 모홀은 지각에 구멍을 뚫으려는 프로젝트에서 이름을 따왔다. 팔로마르는 위쪽, 외부, 우주의 다채로운 측면을 지향하고, 모홀은 아래쪽, 어두운 것, 불쾌한 것, 내면의 심연을 지향하게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글쓰기를 지속하면서 모홀적 글쓰기가 힘들게 느껴진 칼비노는 ‘팔로마르’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팔로마르가 바로 모홀이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한다.
1부에서 팔로마르는 휴가를 떠난다. 해변에 누워 파도와 하늘을 바라보면서, 잔디밭의 잔디들을 바라보면서,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인간 세계와 우주적 시간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시작한다. 그의 독특한 사고와 의문들은 도시로 돌아온 2부에서 계속된다. 쇼핑을 하러 가서, 동물원에 놀러 가서, 거리의 지저분한 비둘기를 바라보면서, 팔로마르는 그 행위와 존재의 의미에 대해 곱씹는다. 이런저런 고찰 끝에 3부에 가서 팔로마르의 머릿속은 사회와 문화, 우주에 대한 의문과 함께 ‘침묵하는 시간’에 들어가면서 결국은 ‘죽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고민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다.
인간 세계와 우주적 현상에 대한 기발한 아이디어로 가득한 철학 소설
작품에서 드러나는 팔로마르는 전작 『마르코발도 혹은 도시의 사계절』 속 주인공 마르코발도처럼 내성적이고 혼자 사색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는 듯하다. 그런 성격 때문인지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의 소통 방식과 그 문제점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예를 들어 「자기 혀를 깨물기」에서는 침묵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말과 침묵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 성찰한다. 또한 세대 사이에 본질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언어를 통한 소통의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소통 방식을 상상하며, 지빠귀의 휘파람 소리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면서 새와의 대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 특정한 주제에 깊이 파고드는 그의 사색은 새로운 인식이나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상식이나 일반적 인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뒤집기를 겨냥한다. 그는 별자리를 찾으면서 동시에 우주와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정육점에서는 미각의 유혹과 함께 각종 육류를 바라보면서 인간과 동물 사이의 역설적 관계에 대해 고찰한다. 더 나아가 모든 것을 합리적 이성과 논리에 따라 파악하려는 현대인들의 관념에 대해서도 의혹의 시선을 던진다.
소설, 그 이상의 ‘작품’을 추구하는 칼비노의 문학적 추구가 오롯이 담긴 작품
『팔로마르』는 대개 소설로 분류되지만 전통적인 소설 양식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주인공도 있고, 행위나 사건도 있고, 상황의 반전도 있지만, 소설보다 오히려 수필에 가깝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사실을 의식한 듯이 칼비노는 작품의 집필 배경과 구성, 의도 등에 대한 ‘소개’ 외에, 차례 앞에다 세 가지로 분류된 주제와 대화, 사색의 유형과 방식 등에 대해 짤막한 메모 형식의 글을 덧붙이고 있다.
구성이나 전개 방식에 있어서도 칼비노의 실험성이 돋보인다. 텍스트는 모두 스물일곱 편의 짤막한 글로 이루어져 있다. 크게 보면 세 부분으로 되어 있고, 각 부분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뉘며, 그 각각이 세 편의 글로 구성된다. 도식적으로 보면 3×3×3 형식이다. 각각의 글은 몇 페이지 되지 않은 짧은 분량이지만, 상당히 압축적이며 곧바로 주제의 본질 속으로 파고들면서 독특한 사색의 장이 펼쳐진다. 그런 만큼 그 안에 담겨 있는 다채로운 뉘앙스와 함축 의미들을 골고루 맛보기 위해서는 주의 깊게 읽어 볼 필요가 있다.
팔로마르의 관찰과 사색은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지침을 제공한다. 마치 삶과 현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의미를 찾아보라고 권유하는 듯하다. 요즘처럼 힘든 세상일수록 팔로마르처럼 색다른 시선으로 우리 주변을 차분히 되돌아보며 세상의 존재 이유와 변화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