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특유의 작법으로 시대를 형상화하는 작가 윤흥길의 단편 〈기억 속의 들꽃〉 〈땔감〉〈집〉을 만난다.
# 기억 속의 들꽃
어느 날 “한 떼거리의 피란민들이 머물다 떠난 자리에 처치하기 곤란한 짐짝처럼 되똑하니 남겨진” 아이 하나가 발견된다. “곱살스런 얼굴에 꼭 계집애처럼 생긴 녀석”은 “착 감기는 목소리에 겁 없는 눈빛”을 하고 있다. 난리통에 부모를 잃고 혼자 남겨진 소녀 명선이가 가지고 있는 금반지를 매개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동네 아이들은 서울 말을 쓰는 낯선 아이에게 텃세를 부리고, 처음에는 명선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부모님은 명선이가 어딘가에 금반지를 더 숨겨 두고 있을 거라는 단서를 잡는 순간 명선이를 감싸고 돈다. 어린 소녀에게는 녹록치 않은 현실이다. 그런 명선이는 폭격으로 허리가 끊어져 철근이 무성한 만경강 다리에 가기를 좋아한다. 그곳에서 명선이는 먼지 속에 뿌리를 내린 작은 꽃 한 송이를 발견한다.
거대한 교각 바로 위 무너져 내리다 만 콘크리트 더미에 이전에 보이지 않던 꽃송이 하나가 피어 있었다. 바람을 타고 온 꽃씨 한 알이 교각 위에 두껍게 쌓인 먼지 속에 어느새 뿌리를 내린 모양이었다.
“꽃 이름이 뭔지 아니?”
난생 처음 보는 듯한, 해바라기를 축소해 놓은 모양의 동전만 한 들꽃이었다.
‘쥐바라숭꽃’이라는, 세상에 없는 이름을 가진 이 작은 들꽃은 명선이에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 땔감
이 작품은 ‘땔감’을 소재로 한 연작 세 편이 묶인 소설이다. 그 시절 땔감이란 언제나 부족하여 가난과 절박한 필요를 대변하는 물건이었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솥에다 삶을 것도 별로 없는 처지이면서 웬일로 그토록 땔감 때문에 늘 쩔쩔매는 살림을 겪어야만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생활이었다.
각각 뚜렷한 중심 사건을 가진 세 편의 이야기는 짧은 호흡으로 이어져 더 큰 흡인력을 갖는다. 첫 번째 이야기는 꽉 막혀 버려 갖은 수를 써도 뚫리지 않는 고래 때문에 도둑질까지 해야 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마음은 커다란 지게를 진 채 칼날 같은 바람을 뚫고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기는 아버지의 구부정한 뒷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주인공과 친구들은 화차에서 석탄을 훔치다가 친구의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마지막 이야기는 ‘토탄’이라는 새로운 연료를 둘러싼 가족의 우여곡절을 그리고 있다. 네모진 구덩이에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결말은 짐짓 모든 갈등은 어쩌면 단순하게 해결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 집
〈집〉은 ‘철거’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다.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이 가장 많이 반영되어서인지, 어린 화자의 시선을 통해 진지하고 밀도 있게 진행된다. 작품에 등장하는 중심 인물(아버지, 어머니, 형)의 캐릭터는 그 동안 동화나 옛이야기에서 보아 왔던 평면적인 인물들과는 아주 다르다. 작가는 관찰자 시선에서, 행동만으로도 인물들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를 치밀하게 그려 낸다. 또 교회 반사를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종’이라는 매개를 통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이끌어낸다. 종 치는 말에 대한 교회 반사의 이야기는 형의 행동을 이해하는 실마리 역할을 하는 동시에,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우의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윤흥길은 현실의 삶에 대한 집요한 애착을 지닌 작가다. 그가 문학을 통해 그려내는 시대는 바로 우리 앞 세대가 지나온 질곡의 역사이다. 한빛문고 014 《기억 속의 들꽃》은 어린 독자들에게, 문학적인 상징을 이해하고 감상하며(〈기억 속의 들꽃〉), 연작 소설이라는 소설 형식을 경험하고(〈땔감〉), 유기적으로 얽힌 플롯과 인물의 입체적인 캐릭터를 이해(〈집〉)하는 수준 높은 문학적 체험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또한 토박이말을 지키고 우리말 고유의 말맛을 살릴 줄 아는 작가 윤흥길 특유의 문체는 이야기가 주는 즐거움 외에도 문체 자체가 주는 ‘읽는 재미’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