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추모비, 베를린장벽 추모공원,
지하 도서관, 슈톨퍼슈타이네 프로젝트, 17번 선로 ……
역사를 가장 예술적으로 기억하는 도시,
베를린으로 떠나는 여행
조각의 역사는 시간의 파괴와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의 역사다. 돌과 쇠붙이로 만들어진 동상과 기념비는 유한한 권력의 자기과시를 넘어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정체성을 보존하며, 지난 시대의 기억을 후대에 전해준다. 우리는 이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기념비 형식을 고민하고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유럽에서 실현된 대표적인 기념비와 기념 공간 들을 연구한 이 책은 기념비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확장하는 중요한 시대적 의미를 갖는다.
─안규철(미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서울시 공공미술위원장)
『베를린, 기억의 예술관』은 한 번 읽고 말기엔 아까운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기념의 공화국’ 베를린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을 얻는다. ‘브란덴부르크 문’과 ‘승전기념물’이 독일의 과거라면, 이 책이 조명하는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와 「도서관」은 독일의 미래다. 이 책은 독일이 걸어온 길이 아니라, 독일이 걸어갈 길을 보여준다. 기념의 홍수 속에서 기억의 갈증에 시달리는 우리에게는 중요한 문제다.
조형의 언어와 인문학의 언어는 문법 자체가 다르다. 하여 줄곧 생각했다. 인문에서 조형의 세계로 향하는 가파른 길을 힘겹게 올라가기보다는, 조형에서 인문의 세계로 내려오는 것이 독자들에게도 좋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던 중 이 책을 만났다. 저자는 까다로운 기념과 조형의 세계를 적확하게, 그러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일상의 언어로 설명한다.
─최호근(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함께 기억하기에 대한 상상력을 넓혀주는 책
도시에 필요한 것은 여백의 공간을 지어 올리는 것
개발을 위해서라면 역사적 장소와 흔적의 파괴도 손쉽게 이뤄지는 한국의 도시들은 쉽게 집단 기억상실증에 빠져버리는 사회의 체질을 부추겨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공동체의 기억(기록), 공간의 고유한 정체성, 과거를 성찰할 수 있는 도시환경의 구축에 가치를 둔 흐름이 꾸준히 시도되고 있다. 2016년 미술, 건축 분야 등 전문가로 구성된 ‘서울시 공공미술자문단’이 출범해 도시 조형물, 공공시설, 공간 디자인의 수준을 높이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이끌어왔다. 지속 가능성에 방점을 둔 도시재생 사업들이 제안, 시행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세월호 참사, 가습기 살균제 사건 등을 겪으며 사회적 참사를 함께 기억하고 애도하는 일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자발적인 시민들의 모임을 기반으로 ‘4.16기억저장소’가 만들어졌고 ‘4.16기억교실’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한 공동체가 겪은 참사를 기록하는 작업, 건축, 공공미술 등으로 그 기억을 물리적 형태로 남기는 작업의 의의와 중요성에 대한 인식 역시 높아졌다.
이 책의 저자는 조형예술을 공부하고 미술기획자로 활동하면서 오랫동안 공공미술에 관심을 가져왔다. 특히 기념문화가 성숙한 독일의 수도이자 “도시 전체가 기념 공간”이라 할 만한 베를린을 2000년대 초부터 지속적으로 탐구해왔다. 한국의 기념조형물이 높이 솟은 기념탑, 위압적인 조형물, 사실적인 위인 동상처럼 여전히 권위적이고 낡은 형식에 머물러 있는 반면, 현대적이며 예술적 완성도가 높을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과 호흡하도록 설계된 베를린의 기념조형물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베를린의 공공미술을 찾아다니며 작품과 설치 장소의 맥락, 그곳을 찾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관찰하고, 느끼고, 경험했다. 긴 기간 동안 여러 번 답사하면서 기념조형물들이 어떻게 유지, 관리되는지, 주변 환경과 방문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도 살폈다. 또한 기념조형물의 역사적 배경, 설계 의도 및 제작 과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다양한 문헌, 시청각 자료를 꼼꼼히 조사, 정리했다. 현재 우리에게 참고가 될 만한 기념조형물의 좋은 선례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 부재한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껴왔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한국 공공미술의 성장을 위해 오래 품어온 공공미술에 대한 생각 그리고 베를린 기념조형물 10곳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이 책에서 나는 베를린 기념조형물들의 공통된 특성에 주목했다. 그 기념조형물은 대부분 역사적인 기억을 품은 장소에 밀착된 느낌을 준다. 광장의 지하에 숨은 듯이 설치되어 있거나, 광고판, 버스 정류장, 기차 승강장, 보도블록 등 도시의 일상을 구성하는 요소처럼 만들어져 있기도 하다. 또 공원처럼 조성되어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고 체험하고 머무를 수도 있으며, 베를린장벽처럼 동서 분단의 유산이지만 사람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된 곳도 있다. 이처럼 일상적인 풍경과 단절되지 않도록 제작, 설치된 방식을 나는 ‘도시의 피부에 스며드는 형식’이라고 오래전부터 정의해왔다. 이런 형식이야말로 기념조형물이라는 ‘예술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적절하다. (중략) 역사적인 기억을 매개하는 예술 작품으로서 하나의 기념조형물을 경험한다는 것은 미적인 체험과 더불어 역사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역사 속의 인간들이 겪었던 아픔과 기쁨까지 모두 공감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기념조형물은 역사의 교훈뿐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해 성찰하도록 만든다. 결국 기념조형물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도시는 역사를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가
망각에 저항하는 예술적인 방법들
『베를린, 기억의 예술관』은 기념조형물이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기록하고 형상화했는지를 세심하게 살핀다. 이로써 하나의 예술 작품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을 발견해간다. 10가지 기념조형물은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것은 때론 길바닥에 납작하게 설치된 작은 동판(「슈톨퍼슈타이네 프로젝트」)이거나, 기념비들의 숲(「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을 이루며, 버스 정류장(「아이히만의 유대인 담당부서」)이거나, 거대한 광고판의 형식(「빛상자들」)을 취하기도 하고, 역사의 흔적을 갖가지 형태로 품고 있는 거대한 기념공원(‘베를린장벽 추모공원’)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기념조형물이 설치된 장소와의 연관성이 뚜렷하며, 주변 풍경에서 단절되지 않도록 맥락과의 조화(혹은 충돌)에 대한 고려가 반영되었던 덕분이다.
이러한 특징은 틀에 박힌 상징과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베를린의 기념조형물들은 대부분 넉넉한 여백의 공간을 품은 채 설명적이거나 장식적 요소를 최대한 배재한다. 이를테면 나치의 야만적인 ‘분서’ 행위를 상기시키려는 미하 울만의 기념조형물 「도서관」은 책이 불태워졌던 장소, 곧 베벨 광장의 지하에 설치되었다. 지상에는 땅바닥에 납작하게 붙은 사각형 투명 유리창만이 있을 뿐이고, 직방체의 지하 공간에는 도서관이라는 이름과 달리 텅 빈 책장만이 존재한다. 「도서관」은 기념비에 대해 흔히 기대되는 도드라진 형태, 뚜렷한 물질성을 거부한다. “책들의 시신조차 남아 있지 않은 텅 빈 묘지 내부” 같은 작품은 분서가 행해진 곳에 남은 침묵을 상징하며, 비워내고 고요해짐으로써 유리창 위의 관찰자들이 더 오래 응시하도록, 더 많이 생각하도록 한다. 또 원래 세계대전의 비극과 희생자를 추모하는 장소로 개조된 ‘노이헤바헤(신위병소新衛兵所)’는 건물 내부의 텅 빈 공간, 그 가운데 놓인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 청동상, 새로 낸 천창을 통한 자연 조명이라는 최소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그로 인해 형성된 여백의 공간이야말로 이 건축물의 변천사에 담긴 고통을 숙고하게 만드는 힘이다. 이처럼 베를린의 기념조형물이 구현한 ‘덜어냄’의 미학은 과밀한 도시에서 관조의 틈새,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베를린의 기념조형물들은 방문객 또는 시민 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게는 기념 공간이다. 홀로코스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