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의 즐거움’을 캐묻는 현대적 사유의 대가
롤랑 바르트가 순례한, 감각적인 일본 문화 지도!
“기호의 제국? 그렇다. 그러나 여기의 기호들은 텅 비어 있고 그 의식rituel에는 신이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_『기호의 제국』에서
"『기호의 제국』은 호사스럽게 취사선택된 앨범이자, 문화적 주제가 차례차례 등장하는 문화적인 경치 또는 지리학이다." _정화열
■ 이 책을 말한다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을 다시 한국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이 책은 1997년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가 오래도록 절판된 상태로 ‘기호’로만 남아 있어, 적지 않은 인문 지성 독자들이 재발간을 기다려온 텍스트였다. 이번에 스키라 판(Skira, 1970)을 번역한 1997년 번역 판본에 더해 세이유 판(Seuil, 2005)의 몇 군데 수정사항을 반영해, 동일한 역자의 섬세한 재작업을 거쳐 새로운 한국 판본을 출간하게 되었다.
특히 이번 산책자 판 『기호의 제국』은 <산책자의 에쎄Essaie>라는 이름으로 이어질 ‘그윽한 사유와 새로운 비평이 담긴 지성 에세이 시리즈’의 첫 권으로써, 현대적 감수성으로 빚은 ‘텍스트의 즐거움’을 찾는 탐서가(산책자)들을 인도하는 ‘산책로 표지판’이기도 하다.
구조주의 시대의 도래를 예고한, 혁신적인 이론과 문체로 빛나는 현대 비평의 핵심 텍스트
『기호의 제국』에서 바르트가 구성해낸 일본은 하나의 텍스트이며, 그는 “그곳에서 나는 여행객이나 방문객이 아니라 독자”라고 말한다. 그가 일본에서 읽고 있는 여러 문화 현상들은 간단한 사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씌어진 텍스트다. 그것도 단순한 논리나 사건 중심으로 씌어진 것이 아니라 하이쿠처럼 언어를 통해 언어의 핵심에 이르려는, 몸짓으로서의 글쓰기를 통해 씌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일본 문화라는 텍스트에 대한 일종의 비평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여러 문화 현상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이 책은 결코 일본 문화에 ‘대한’ 글이 아니다. 바르트는 자신이 다루는 일본이 어떤 실체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몇몇 특질들을 골라내서 정성스레 만들어낸” 하나의 체계라고 못 박고 있다. 바르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일본 문화 현상 뒤에 숨겨진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는 일본이라는 텍스트 속을 이리저리 거닐며 유유히 즐길 따름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일본 문화의 정수를 꿰뚫는다. 일본 문화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쓱 한번 살피고 부드럽게 빠져나오는 것이다. 이 행위에서 바르트가 경험하는 것은 ‘텅 비어 있음’이다. 주어의 자리가 비어 있는 일본어 문장에서, 중심이 텅 비어 있는 도쿄라는 도시에서, 씌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배우의 텅 빈 얼굴에서,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덴푸라 요리에서, 개인이 사라지고 없는 공손한 인사에서, 사물에 대한 묘사와 정의를 거부하고 기호의 흔적마저 지워버림으로써 언어의 갑작스런 중단에 이르는 하이쿠에서, 무를 둘러싼 건축물에서, 텅 비어 있음을 포장한 선물꾸러미에서, 지면을 한 방향으로만 긁는 펜과 달리 허공을 자유롭게 미끄러지면 텅 빈 공간의 흔적을 감아놓는 붓글씨에서, 바르트는 ‘텅 비어 있음’을 발견한다.
『기호의 제국』은 일본의 모든 사물에서 기호학적 표식을 추구하는 하나의 순례기라고 할 수 있다. 선과 깨달음, 무(無), 하이쿠, 스모 선수, 파친코, 꽃꽂이, 가부키, 분라쿠, 전학련, 젓가락, 미소 된장, 사시미, 스키야키, 덴푸라… 일본을 상징하는 이 모든 것들은 이국적인 이미지로 가득 찬 미식가의 메뉴와도 같다. 이 현란해 보이는 낯선 텍스트들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은 단지 포장에만 국한된 관심을 뜻하지 않는다.?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안과 밖, 외견과 본질, 표면과 내면, 명백성과 잠재성, 추상성과 구체성, 텍스트와 의도, 스타일과 형식, 그리고 행위와 말 등의 평범한 이분법이 소멸되어야만 비로소 일본 문화의 '성(誠)'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해체주의적 문법이야말로 이제까지 일본을 분석해온 다른 서양 학자들과 바르트의 차이다.
이 책에서 바르트는 ‘지적 지역주의’를 극복하면서 서구의 자기도취증을 넘어서려 시도한다. 흥미롭고 풍부한 기표들로 넘쳐나는 일본에 대해 기쁘게 사유한다. 기의 없는 일본 문화의 내면은 알 수 없는 것이고, 보이지도 않는다. 바르트가 구축해낸 이 ‘언어의 제국’을 따라가다보면, 그 내밀한 의미를 모두 알아챌 순 없지만 어떤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이 텍스트의 쾌감이야말로 솔직함에서 비롯된, 동양에 대해 아는 체하는 서구적 지성주의를 해체하는 시초라고도 할 수 있다.
아무것도 ‘평’하거나 ‘논’하지 않는 평론이라는 점에서,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담론이라는 점에서, 충일함과 가벼움의 두께를 보여주는 글쓰기라는 점에서『기호의 제국』은 바르트 자신과 정화열 선생이 해설에서 지적한대로 ‘깨달음으로서의 글쓰기’와 ‘일본’이라는 독특한 스타일을 느끼게 해준다. ?
■ 롤랑 바르트는 누구인가
Roland Barthes 1915-1980
1915년 프랑스 남서부 대서양 연안 바욘에서 출생. 아홉 살이 되던 해 파리로 이주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중 결핵으로 입시를 포기하고 피레네로 요양을 떠났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군복무 면제를 받고 비아리츠와 파리의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41년 결핵이 재발해 사직했다. 그 후 5년간 알프스에서 요양하면서 사르트르와 마르크스에 심취했다. 파리에서 회복 기간을 보낸 후 루마니아와 이집트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이집트에서 그레마스와 교유하며 현대 언어학에 입문하게 된다. 프랑스로 돌아온 뒤 1953년 『글쓰기의 영도』를 출간했다. 이후 『신화론』(1957), 『모드의 체계』(1967)를 차례로 출간하였고, 1962년 파리고등실업연구원의 연구책임자로 임명되어 47세에 비로소 직장다운 직장을 잡게 된다. 그동안에도 누보로망 등 다양한 문학적 주제에 대한 에세이들을 발표하면서 활동하긴 했지만 아직까진 프랑스 문학계의 주변인에 불과했다. 그러다 소르본 대학교의 피카르 교수가 바르트를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국제적인 악명을 얻게 되며 유명해졌다. 그 후 일본을 여행하고 쓴 『기호의 제국』(1970)으로 문학 비평에서 구조주의 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레비-스트로스, 푸코, 라캉 등과 함께 프랑스 석학으로 자리 잡은 그는 구조주의자로서 이름을 드높인 저서 『텍스트의 즐거움』(1973)과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1975)를 잇달아 펴냈다. 정년퇴임을 바라볼 나이인 61세가 되던 1976년 바르트는 프랑스 학제의 최고 자리라 할 수 있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977년 펴낸 『사랑의 단상』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등 대중적 인기도 함께 얻기 시작했다. 1980년 2월 콜레주 드 프랑스 앞에서 길을 건너다 트럭에 치인 뒤 4주 후에 사망했다.
‘현대 비평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으로 꼽히는 바르트는 당시 정신분석이 대유행이던 파리에서 전통적인 문학 가치를 추구하고 일상을 파고든 비평가이자 지식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문화 현상에 접근한 구조주의자로 기호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독자의 옹호자’이자 ‘작가의 죽음의 대행인’로 ‘텍스트의 쾌락’을 역설한 스타일리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