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가장 순수한 시이며 완전한 노래
비참한 현실이 만들어내는 기묘하고도 역설적인 아름다움
“나는 설명할 수 있는 이유 없이 웁니다.
그저 고통이 나를 관통하는 것 같다고 할까요.
누군가 울어야 하고, 그 누군가가 바로 나인 것처럼요.”
진행되는 삶 속의 죽음, 허나 결코 삶을 앗아가지 않는 죽음.
가난과 질병, 굶주림과 죽음이 가득한 1930년대 인도의 캘커타. 세상의 모든 고통이 모이는 듯한 그곳에서 소설가 피터 모르간은 한 미친 거지 여인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길을 잃기 위해 무작정 걷는’ 기나긴 여정 중에 미쳐 버린 그녀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곳인 바탐방이라는 단어만을 기억하고 반복해서 말할 뿐이다.
또 하나의 인물, 라호르의 부영사 장 마르크 드 H. 그는 거지들과 나병 환자들이 모여 있는 캘커타의 광장을 향해 총을 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프랑스 대사인 스트레테르로부터 처분을 기다리는 중이다. 어느 날, 대사관에서 열린 파티에 초대된 그는 대사의 부인인 안 마리를 만나게 된다. 무성한 추측과 소문의 중심에 있는 이들의 모습에,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부영사는 안 마리, 관대한 남편의 묵인과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정부를 여럿 거느리지만 존재의 근본적인 권태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한 그녀에게 묘한 매력을 느낀다.
프랑스 문학의 거장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그려낸 인간의 욕망
『부영사』는 전통적 소설 기법과 결별하고 누보로망에서도 비켜 나와 자신만의 독자적 글쓰기를 해온 뒤라스가 오십 줄에 접어들어 작가적 개성이 무르익은 시기에 집필한 소설이다. 뒤라스적 특성, 즉 심리묘사 배제, 언어의 간결성, 반복, 암시, 맥락 없는 대화, 모호성, 감각적 분위기, 끝내 폭발되지 않는 욕망 등이 집약돼 있다. 프랑스에서는 뒤라스의 작품세계를 연구할 때 끊임없이 거론되는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다. 『부영사』에서 뒤라스는 철저히 혼자인 인물들을 지탱하는 익숙한 정적과 침묵, 타인과의 간극, 회피 속에서 이타심을 강요당할 때의 괴로움, 외면하고픈 현실과 동떨어지지 못한 채 끝내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짤막하고 간략한 대화와 묘사를 통해 그려냈다.
이 소설에는 일견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이야기가 교차된다. 어린나이에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임신했다는 이유로 어머니한테 쫓겨나 캄보디아의 톤레사프에서부터 무작정 10년을 걸어 인도의 캘커타에 이른 여자걸인의 이야기가 그 하나고, 계절풍이 부는 인도의 무더위와 권태에 짓눌린 캘커타 주재 프랑스 대사의 부인 안 마리 스트레테르와 라호르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캘커타로 좌천돼 당국의 처분을 기다리는 중에 안 마리 스트레테르를 사랑하게 된 라호르 주재 부영사의 이야기가 다른 하나다.
수많은 생략과 침묵을 채우는 것은 간략한 묘사들이고, 대화와 수군거림은 넘쳐나지만 불충분하다. 또한 빈약한 정보마저 틀리거나 모호하다. 캘커타는 인도의 수도가 아니고, 걸인 소녀가 거치는 인도차이나의 도시들은 실재하지만 허구의 세계를 구축하는 구체적 지표의 기능을 하지 않으며, 학창시절에 대한 부영사와 유럽협회장의 추억은 혼동되거나 상호 혼합된다. 하지만 줄거리 자체를 따라가기보다 캘커타의 계절풍과 무더위, 길가에 늘어선 종려나무들, 갠지스 강가에서 얽히고설켜 잠을 자다가 음식을 얻기 위해 프랑스 대사관 앞으로 자리를 옮겨 널브러져 있는 문둥이들, 휑한 테니스장, 걸인 소녀의 허기와 바탐방의 노래, 안 마리 스트레테르의 슈베르트 피아노 연주, 부영사가 휘파람으로 부는 인디아나 송. 부영사의 총격, 부영사와 협회장의 비몽사몽간의 대화 그리고 연회장의 선풍기 바람아래서 느릿느릿 춤추는 사람들 등 장면 장면 이미지들을 천천히 따르며 상상력을 동원하다보면 어느 순간 이 모든 상반된 것의 조각들이 놀랍게도 하나로 총합될 것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연출한 영화 「인디아 송」의 모태가 된 『부영사』
뒤라스는 1996년 사망하기 1년 전까지 소설, 산문, 희곡, 시나리오 등 장르를 넘나들며 왕성한 필력을 펼쳤고, 실험적 영화를 개척했다. 뒤라스가 영화로 만든 「인디아 송」은 『부영사』의 배경과 등장인물을 그대로 차용하여 만든 작품이다.
「인디아 송」은 뒤라스가 카메라로 다시 쓴 『부영사』에 가깝고, 소설과 영화가 상호보완적이다. 특히 유령같이 대사관을 떠도는 인물들과 인물 못지않은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경들, 취하도록 흐르는 음악, 아련한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완벽해 보이는 100% 보이스 오프 기법은 소설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면서도 또 다른 상상의 여지를 남긴다.
부영사와 안 마리 스트레테르의 욕망과 관능을 표현해 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영화「인디아 송」에 매력을 느꼈다면, 이 작품의 모태가 된『부영사』에도 분명 흠뻑 빠져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