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사 3부작

카를 마르크스
5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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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에 재출간되는 마르크스 역사학의 명저술 3편 모음집. 카를 마르크스가 역사적 유물론을 정식화한 후, 그의 역사관을 현실 정세 분석에 적용한 3편의 저작인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백미로 꼽힌다. 역사 해석과 현실 참여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관계가 어떻게 상호 침투할 수 있는가를 예시한 마르크스 실천론의 정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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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을 다시 펴내며 개정판을 내면서 초판 서문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서문|엥겔스 I. 1848년 6월의 패배_1848년 2월부터 6월까지 II. 1849년 6월 13일_1848년 6월부터 1849년 6월 13일까지 III. 1849년 6월 13일의 결과들_1849년 6월 13일부터 1850년 3월 10일까지 IV. 1850년 보통선거권 폐지 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 제2판에 붙이는 저자 서문 독일어판 제3판에 붙이는 엥겔스의 서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프랑스 내전 서문|엥겔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대한 총평의회에서의 첫 번째 연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대한 총평의회에서의 두 번째 연설 1871년 프랑스 내전에 대한 국제노동자협회총평의회에서의 연설 노트 부록 1 사건 일지 부록 2 인명 해설과 찾아보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30년 만에 재출간되는 마르크스 역사학의 명저술 3편 모음집 카를 마르크스가 역사적 유물론을 정식화한 후, 그의 역사관을 현실 정세 분석에 적용한 3편의 저작인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백미로 꼽힌다. 역사 해석과 현실 참여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관계가 어떻게 상호 침투할 수 있는가를 예시한 마르크스 실천론의 정수이기도 하다.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마르크스가 1848년 혁명의 실패에 대해 분석하면서 프랑스의 계급투쟁을 다룬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 이래로 유럽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의 원인과 성격을 규명하면서 유물변증법이라는 방법을 처음 적용하였다. 토대와 상부 구조의 연관, 사회생활에서 경제적 토대의 규정적 역할, 계급투쟁과 당파 투쟁이 지니는 의미, 역사에서 혁명적 변혁이 차지하는 위치와 인민 대중의 결정적 역할, 역사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 이념의 역할 등에 관한 역사적 유물론의 중요한 원칙들이 이 저작에서 구체적이고 발전된 형태로 나타나 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마르크스의 수많은 저작 가운데서도 가장 빛나는 저작이라고 평가받고 가장 많이 인용되는 작품이다. 나폴레옹의 조카라는 이유로 권력을 장악하여 대통령직을 차지한 루이 보나파르트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를 수립하고 그 후 스스로를 나폴레옹 3세로 공표한다. 이 희대의 역사적 역주행을 분석하면서 마르크스의 문장은 “화살이 되고 창이 되었으며 낙인을 찍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철필(鐵筆)이 되었다”(리프크네히트)는 평가를 받았다. 이 저작에 대한 마르크스의 자평은 다음과 같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근대 사회에 계급이 존재한다거나 계급투쟁이 있다는 것을 밝혀낸 공적이 마땅히 나에게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기 오래전에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계급투쟁의 역사적 발전을,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계급 간의 경제적 적대관계를 기술했습니다. 내가 새롭게 행한 일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1) 계급의 존재가 생산의 특정한 역사적 발전 단계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 2)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 3) 이 독재 자체는 계급의 폐지와 계급 없는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통로일 뿐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었습니다.”(바이데마이어에게 보낸 편지) <프랑스 내전> 1871년 파리 코뮌에 대한 평가를 담은 마르크스의 저술이다. 코뮌 패배 직후에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승인을 받아 발표하였다. 1871년 3월 파리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 역사상 최초로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수립 선포되었다. 그러나 고작 두 달을 버텼을 뿐이다. 혁명의 결과는 무차별 학살이었다. 비관주의와 염세주의로 흉흉했지만 마르크스의 평가는 달랐다. “노동자들의 파리는 코뮌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의 영광된 선구자로서 영원히 찬양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의 관료적 국가 기구와 낡은 군대 및 경찰, 그리고 행정 및 사법 기관을 폐지한 것은 파리 코뮌의 위대한 역사적 행위라고 선포하였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모든 생산 대중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제 조건은 부르주아지의 국가 기구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파리 코뮌이 실천에 옮겼다고 찬양하였다. <프랑스 내전>을 통해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국가를 사회주의적 목적에 이용할 수 있다는 개량주의적 환상을 분쇄하였다. 마르크스가 입증한 대로 부르주아 국가는, 그것이 군주정이든 보나파르트 체제건 혹은 의회주의적 공화정이든 간에, 그 착취적 본질은 변화하지 않는다고 설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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