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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최고의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로 꼽히는 존 파울즈(1926~2005)의 『마법사』가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파울즈는 이번에 출간된 『마법사』를 비롯해 『컬렉터』(1963), 『프랑스 중위의 여자』(1969), 『만티사』(1982) 등 일련의 작품들에서 인간 본질에 대한 실존적 문제를 독창적이고 실험적 형식으로 성찰한 작가이다. 그중에서도 『마법사』는 비범한 상상력과 혁신적인 서술 기법으로 영국 소설사에 한 획을 그었으며 히피 세대의 필독서가 된, 파울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한 중산층 지식인의 정신적 방황을 그린 성장 소설이기도 한 『마법사』는 20세기 유럽의 현대사를 바탕으로 고전 신화와 비교(秘敎), 다양한 종교와 철학, 사이드와 엘리어트, 셰익스피어 등을 지적 배경으로 하고 있어, 독자는 지성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마법사』는 데뷔작인 『컬렉터』보다 조금 늦은 1966년 처음 출간되었지만, 사실상 1950년대 초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작품을 완성하는 데 15년, 다시 마지막 장면을 비롯하여 여러 부분을 개작하는 데 10여 년이 걸린, 파울즈 일생의 대작이다.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마법사』의 번역 대본은 1977년에 출간된 개정판으로, 전반적인 문장과 구성은 물론이고, 가장 중요하게는 결말 부분이 초판과 달라지는 이 판본이 국내에 번역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리얼리티와 픽션 사이를 오가는 주인공의 방황
소설은 부패하고 타락한 현실의 공간으로 그려지는 런던 생활에 염증을 느낀 주인공이 그리스의 한 외딴 섬으로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니컬러스 어프는 상당 부분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반영된 인물이다.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사립 고등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고, 마지못해 군대에 복무했으며, 대학 졸업 후 그리스의 섬에 교사로 지원해 가는 점이 작가의 이력과 똑같다. 실제로 파울즈는 개정판 머리말에서 『마법사』의 무대가 되는 프락소스 섬은 자신이 교사로 근무했던 스페차이 섬을 모델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작가가 실제로 경험했던 아름답지만 고독한 그리스의 외딴 섬에서의 생활과, 그곳에 있었던 기숙 사립학교와 한적한 별장 등이 신비롭고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소설의 모티브가 된 것이다.
『마법사』에서 주인공 니컬러스는 리얼리티와 픽션 사이의 유희를 오가며 끊임없이 갈등한다. 현실 세계로 그려지는 런던과 신비의 세계로 그려지는 프락소스 섬, 현실성을 상징하는 여인 앨리슨과 상상력을 상징하는 여인 릴리가 대비되는 가운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인지 반전에 반전이 거듭된다. 한편으로는 지루한 현실 세계의 삶을 부정하던 니컬러스는 막상 눈앞에 믿기 어려운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자 그것들을 이성으로써 하나하나 반박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신의 유희, 그리고 그에 대한 인간의 선택
파울즈는 <신의 유희>를 이 작품의 제목으로 진지하게 고려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신의 유희>는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는 절대자의 존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는 말이며, 모든 것을 기획하고 통제하는 콘키스는 작품 속에서 신적 존재에 해당한다. 이 작품에서 종종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 바로 니컬러스를 대상으로 콘키스가 벌이는 진실 게임의 규모와 그 동기의 문제이다. 어떻게 보면 파울즈는 모든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인간의 비이성적 환영을 가장 비이성적 방식으로 그려내는 정면 승부를 택한 셈이다. 진실과 거짓이 혼동되는 가운데 실존적 선택을 하게 되는 니컬러스와 같이 독자 역시 복잡하게 얽혀 있는 픽션과 리얼리티 사이에서 작품이 지니는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게임을 혹독하게 겪고 현실 세계인 런던으로 돌아온 니컬러스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새롭게 각성하게 되며, 이제 그 자신이 리얼리티와 픽션을 넘나드는 <마법사>가 된다. 1966년 초판에는 작품의 마지막에 니컬러스가 다시 만난 앨리슨에게 헤어지자고 한 뒤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는 눈속임 연기를 요구하는 부분이 있었으나, 1977년 판에서는 니컬러스가 콘키스를 의식하는 대신 그저 무의식적으로 앨리슨의 뺨을 때리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즉, 작가는 니컬러스가 더는 콘키스의 유희에 얽매이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세계에 서게 되는 것으로 결론을 바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