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과 파괴의 광기부터 운명과의 화해와 성찰까지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서 변주하는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고통과 희망의 심연
스페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그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최고의 스토리텔러이자 스타일리스트이다.
숱한 비극과 고통, 폭력과 억압으로 얼룩진 운명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이들의 삶을 화려하고 강렬한 미장센으로 표현해온 알모도바르가 그의 첫 단편소설집 《마지막 꿈》으로 한국 독자들을 찾아왔다. 《마지막 꿈》은 그가 영화에서 보여준 감각적인 색채와 폭발적인 서사를 문학으로 되살려냄으로써 장르와 주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 세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에는 알마도바르의 자전적 이야기와 그의 영화의 근간이 된 12편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다루고 있는 에피소드들에는 가톨릭 교회의 모순과 위선, 관능, 모성애, 고립 등 그가 영화에서 꾸준히 다루어온 시그니처 테마들이 등장하기도 하고(〈방문〉), 흡혈귀와 잠자는 숲속의 미녀, 예수와 바라바 등 기존의 이야기 소재가 재해석되어 창조되기도 한다(〈거울 의식〉, 〈아름다운 광녀 후아나〉, 〈속죄〉). 이 작품들에서 우리는 알모도바르 특유의 유머와 도발, 발랄한 상상력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지만, 몇몇 작품(〈화산같이 살다간 이여, 안녕〉, 〈공허했던 어느 하루의 기억〉, 〈나쁜 소설〉)에서는 그가 살아오면서 체득한 삶에의 관조 혹은 성찰, 통찰을 목격하기도 한다. 특히 스스로 자신의 글 가운데 최고라고 평가한 〈마지막 꿈〉은 가난하고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삶에 대한 긍정을 잃지 않았던 강한 어머니, “현실이 더 완전해지고, 더 즐겁고, 더 살기 좋아지려면 어떻게 픽션을 필요”로 하는지를 가르쳐준 그의 어머니에게 헌정하는 작품으로, 알모도바르의 많은 영화에서 묘사되었던 ‘모성성’을 떠올리게 하며 큰 여운과 감동을 남긴다.
이처럼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오랫동안 소설을 써온 작가 못지 않은 깊이 있는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이에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이렇게 말한다.
알모도바르는 서문에서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작가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자신 있게 쓴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어떤 대목들은 영화의 장면들보다 훨씬 모호하고 섬세하다. 아마 누군가는 알모도바르가 소설가의 숲길을 가지 않고 영화감독의 강변을 따라 흘러간 것을 안타까워할 것이다. 영화의 편에 서 있는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소설에서 알모도바르를 훔쳐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다만 이 한 권 정도는 양보할 수 있다. 그래도 아슬아슬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빨리 알모도바르의 다음 영화를 보고 싶다. 그래야 소설을 쓸 시간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 꿈》은 그가 쓰는 것(글), 촬영하는 것(영화), 그리고 살아내는 것(삶)이 맺고 있는 밀접한 관계를 훌륭하게 드러내보임으로써 50여 년에 걸쳐 구축해온 그의 예술 세계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알모도바르는 단 한 권의 책으로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이야기꾼이자 작가인지를 증명해냈다.
간결하면서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우아하면서도 현실적인 언어의 향연
이 작품집에 수록된 열두 편의 이야기에는 196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페드로 알마도바르가 수없이 꿈꾸고 영화로 구현한 현실과 상상의 세계가 담겨 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써온 이 이야기들은 〈나쁜 교육〉, 〈페인 앤 글로리〉 등의 한 시퀀스로 모습을 드러내거나,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내 어머니의 모든 것〉, 〈휴먼 보이스〉 등의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등 그의 영화 작업에 토대가 되었다.
동시에 이 이야기들 곳곳에는 그의 영화 이전에 인간 알마도바르의 면면이 그려져 있다. 가난하고 어두웠던 학창 시절을 지나 폭발적인 아이디어와 에너지로 무장한 도발적인 예술가로 발전하는 모습, 세계적인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명성을 얻은 이후 대가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 예술가의 자서전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영화’라는 외피를 입은 그의 예술 세계가 발현되기 위해 필요했던 모든 것이 탄생하고 최고의 순간에 도달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그러한 세속적인 성공 이후에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욱 깊어진 사유와 성찰에 도달한 거장의 여정을 함께한다. 삶과 예술, 허구와 현실의 관계를 변주하는 이야기들을 통해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평생을 천착해온 욕망, 죽음, 고독, 예술적 창작의 고통과 영광의 길에 동행함으로써 그가 살아온 삶 자체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꿈》을 우리말로 옮긴 엄지영은 알모도바르가 이 자리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알모도바르에게 있어 이야기를 생산하는 근원적인 힘은 “삶에 대한 욕망”이다. 그리고 그 욕망은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니체나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거짓을 만들어내는 역량—는 궁극적으로 필연의 억압에서 벗어나 모든 것이 항상 돌발적이고 즉흥적인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우연”의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욕망의 지도를 그리고 “가능한 세계”의 건축학을 꿈꾸는 것이리라. 알모도바르는 이야기를 통해 삶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을 되찾고 슬픔과 체념을 진정한 축제의 기쁨으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아직은 낯설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름, 소설가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표현대로 “우리는 이 책을 읽고 나면 영화를 보았을 때보다 알모도바르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 것만 같은 착각”을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