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 테슬라의 인생과 작업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연구!”
- 데이비드 E. 나이 남덴마크대학교 교수
▼ 천재 발명가를 둘러싼 신비로운 분위기와 뜨거운 관심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1856~1943)는 발명과 특허, 이론 작업을 통해 현대 교류 전기의 근간을 마련한 탁월한 천재 과학자다.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과 마찬가지로 미국 최초의 과학계 명사로서 뉴욕 사교계를 주름잡고 전기에 관한 환상적인 실연을 통해 마크 트웨인Mark Twain을 비롯한 수많은 당대 사람들을 매료했다. 자신을 영리하게 내세우는 데 재능 있는 흥행사였던 그는, 빈곤한 노년기에도 해마다 생일이면 기자들을 모아 인터뷰를 하면서 인류의 평화를 보장할 무기를 발명했다고 주장해 대중적으로 괴짜 천재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또한 신비한 자질, 비현실적인 성향과 에디슨 같은 특권층에게 당한 무시는 그를 아웃사이더로 비춰지게 했고 때문에 오늘날 반문화의 영웅으로도 인식된다.
테슬라는, 자신의 이름이 걸린 큰 기업을 이루지 못했고 냉전 시대의 미국에서 유용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에디슨이나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와 달리 20세기 후반의 역사책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10대 후반 소년을 겨냥한 비디오게임에 등장할 정도로 대중문화의 주류에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책 속에 갇힌 채 근엄하게 가르치는 위인이 아니라, 매일 일상에서 쉽게 만나며 영감을 주는 기발한 친구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 꿈과 상상력으로 세상을 바꾼 영원한 소년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달하는 데 필요한 환상을 발견하는 능력은 테슬라의 장점이면서 약점이기도 했는데, 그는 기꺼이 이단자처럼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정문을 두드린다면 뒤로 돌아가 뒷문이 있는지 살피는 것이 앞서는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뒷문을 찾아내려면 폭넓은 상상력을 길러야 한다.
테슬라는 소년기 때부터 두렵고 무질서한 세상과 마주쳤다. 낯선 땅에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다 장남을 잃어 정신적 상처를 가진 부모 밑에서 성장하며 무시무시한 이미지와 악몽에 시달린 것이다. 그런데 어린 테슬라는 무시무시한 이미지에 지배당하기보다 악몽을 극복하고 기분 좋게 정신적인 여행을 할 수 있게 상상력을 발휘하는 방법을 익혔다. 그리고 상상력을 마음껏 쓸 수 있게 되자, 그 재능을 발명에 응용했다. 나이아가라폭포에 대한 글을 읽고는 커다란 물레방아를 만들어 그 폭포의 힘을 붙잡아 보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 이렇게 회고할 수 있었다. “내가 삼촌한테 미국에 가서 이 계획을 실천하겠다고 했는데, 30년 뒤 나이아가라에서 내 아이디어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테슬라는 우리에게, 기술자는 시인처럼 열심히 생각하되 과감하게 꿈꿀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편견에서 벗어나 순수한 호기심으로 자유롭게 모험을 펼치는 소년들을 소설 속에 그려 낸 작가 마크 트웨인과 테슬라가 오랫동안 가까이 지낸 것도 우연은 아닌 듯하다.
▼ 내면의 아이디어를 사회의 요구와 연결하려는 노력
테슬라는 원리를 발견하고 새 기술을 그려 보는 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진심으로 발명가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상상과 현실을 연결하려고 노력하는 배경에는 아버지의 세르비아정교회 신앙으로부터 받아들인 로고스가 있었다. 정교회 신자들에게 물질적인 세상은 질서 정연할 뿐 아니라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그 속의 모든 것은 사람이 찾아낼 수 있는 원리인 로고스가 바탕을 이룬다. 따라서 인간이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는 방법들 중 하나는 모든 사물에서 로고스를 찾는 것이고, 테슬라도 이런 믿음을 받아들였다.
테슬라는 자신이 완벽한 기계를 머릿속에서 설계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모든 발명가와 마찬가지로 그도 자신의 아이디어를 작동하는 장치로 바꾸려고 할 때마다 문제에 봉착했다. 그리고 당연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테슬라가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집요하게 분석했다는 증거는 바로 그의 연구소 벽에 걸려 있던 자그마한 칠판이다. 이 칠판은 여기저기 검은 칠이 벗겨지고, 숫자와 유대인의 신비주의적 기호로 덮여 있었다. 그는 이 칠판에 환상을 그리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아이디어가 만들어지는 동안 그것을 갈고 닦기 위해 자신이 아는 수학을 썼다. 그렇다면 그에게 아이디어는 완성되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상상력 발휘와 가능한 해결책을 찾는 세심한 조사에 따른 결과였다. 이 두 가지 활동이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함께 작동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무것도 발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 혁신적 기술과 창조적 파괴의 디딤돌과 걸림돌
경제학자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는 근대 경제의 혁신적인 활동에 두 가지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쪽에는 기업가와 발명가의 창조적 반응이 있다. 이들은 아주 새로운 제품·공정·서비스 등을 도입하며 기존 산업 패턴과 소비자들의 일상생활을 바꾸는 창조적 파괴를 일으킨다. 다른 한쪽에는 제품과 서비스가 생산되고 소비될 수 있도록 기업의 구조와 제조 과정, 마케팅 계획을 세우는 관리자와 기술자의 적응적 반응이 있다. 테슬라가 활동한 1870년부터 1920년까지 미국 경제의 성공은 분명히 창조적 혁신과 적응적 혁신의 알맞은 혼합에 의존했다. 하지만 이 알맞은 혼합은 자동적이지도 않고 분명한 것도 아니다. 아이디어가 창조적 파괴를 일으키는 혁신적 기술이 되려면 발명가가 자신의 마음속에서뿐 아니라 후원자와 맺는 관계에서도 상상력과 분석의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테슬라는 1904년에 앞으로 “시계보다 크지 않은 값싼 수신기를 통해 지상이나 해상을 불문하고 어디서나 연설에 귀를 기울이거나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연주되는 음악이라도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하고 전망했다. 누구나 쓰는 수신기를 꿈꿨다는 점에서 그는 20세기 소비문화의 조짐을 일찌감치 드러낸 셈이다. 21세기의 관점에서는 소비문화가 대량생산으로부터 성장했으며 전 세계 경제의 상당한 부분이 휴대전화, 아이팟, 노트북 같은 제품의 대량 소비에 의존하는 것이 명백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20세기 초에는 소비문화의 혁명이 분명하지 않았고, 한때 테슬라를 후원한 모건J. P. Morgan을 비롯한 산업과 생산문화의 지도자들에게 테슬라의 전망은 틀림없이 낯설어 보였을 것이다.
자신이 산 시대를 앞서 미래를 본 테슬라가 교류 관련 작업을 할 때는 후원자와 유익한 균형을 이루며 세상을 바꿨다. 하지만 무선 송전에 관해서는 아이디어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그것을 실제 사업에 맞게 조정하지 못했고, 생산문화에 기울어진 사람의 후원을 받기 위해 소비문화의 주장을 쓰며 헛된 노력만 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