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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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을 생각한다 테리 이글턴의 《유물론》을 읽는 평균적인 독자는 그의 서술이 산만하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널리 알려진 20세기 철학자들인 마르크스, 니체,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가 이른바 “신체적 유물론자”로서 주로 언급되지만, 그들에 못지않게 13세기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역시 자주 거론된다는 점부터가 의아하게 다가올 만하다. 가톨릭의 성인인 아퀴나스와 유물론은 상극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저자의 신체적 유물론이 보편적 존재론으로 자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물론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오로지 물질만 존재하며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식의 보편적 주장을 떠올리지만, 이는 이글턴이 책의 첫머리에서 열거하는 유물론의 여러 형태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글턴의 신체적 유물론은 그런 거창한 존재론적 주장과 사뭇 다르다. 신체적 유물론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혹은 태도다. 그래서 저자는 “인간학적 유물론”이라는 대안적인 명칭도 제안한다. 저자에 따르면 “신체적 유물론”은 “인간과 관련해서 가장 확실하게 손에 잡히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이며, 그 확실히 손에 잡히는 것은 “인간의 동물성, 실천적 활동, 신체 구조”다. 요컨대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의 몸이다. 그는 인간의 몸을 철학적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며, 이 입장을 신체적 유물론으로 부른다. 그러므로 기독교도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체적 유물론자로 분류되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저자가 옳게 지적하듯이 “기독교는 영혼의 불멸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믿는” 종교니까 말이다. 우리가 몸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계승한 토마스의 기본 전제였다. 자기 자신에게 낯선 자, 인간 물론 똑같이 몸을 주목하면서도 몸의 어떤 측면을 부각하느냐는 철학자마다 다를 수 있다. 실제로 이 책이 다루는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크스, 니체,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는 결코 단조로운 선율을 연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마치 프리 재즈를 하는 연주자들처럼 각자 자신의 음악을 들려줄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음악을 뭉뚱그려 신체적 유물론이라는 느슨한 통일체를 구성하는 작업은 어느 정도 산만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신체적 유물론이 일관성을 갖췄다는 점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일관성은 저자가 공격하고자 하는 적이 누구인가를 보면 꽤 명확하게 드러난다. 한편으로 그 적은 역시나 관념론이다. 이때 관념론이란, 오직 관념만 존재한다, 라는 식의 거창하고 공허한 존재론적 주장이 아니다. 이번에도 핵심은 인간을 대하는 태도, 기본적인 인간상이다. 이글턴이 말하는 관념론은 인간을 절대적으로 자율적이며 자족적인 존재로 보는 관점이다. 거기에 맞서 신체적 유물론은 인간 주체가 항상 자기에게 어느 정도 낯선 자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 주위에서 인간의 절대적 자율성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이글턴이 맞서는 적이 그런 자율적 자족적 주체에 기초를 둔 ‘관념론’뿐이라면, 그의 대결은 우리에게 큰 관심거리이기 어려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글턴은 또 다른 강력한 적에 맞선다. 그 적은 그가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이라고 부르는 형이상학적 유물론이다. 생기론적 유물론의 전통 안에 있는 신유물론은 생명이라는 신비로운 개념에 취해 인간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와 마찬가지로 신유물론은 탈인간적 관점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글턴은 이런 탈인간적 관점 역시 ‘관념론’과 마찬가지로 한쪽 극단으로 치우쳤다고 비판한다. 그는 “신체적 유물론자”로서 “인간과 관련해서 가장 확실하게 손에 잡히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하며, 그래서 포스트구조주의와 ‘신유물론’이 말하는 탈인간화의 요구 앞에서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라고 묻고 있다. 착취적 세계에서 인간이 처한 운명 이글턴에게 물질(대표적으로 몸)은 우리의 기반인 동시에 굴레다. 물질은 우리에게 완강히 저항한다. 이 같은 물질의 완강함을 알아채고 인정하는 것이 신체적 유물론, 나아가 무릇 유물론의 출발점이다. 그럼에도 이른바 신유물론은 우리와 물질 사이에 존재하는 이 엄연한 맞섬을 은폐하면서 양자의 동질성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글턴은 “일부 생기론적 유물론자들은 인간과 나머지 자연의 다름을 강조하는 것은 차별적인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라고 우려”하지만, “인간이 고슴도치보다 더 창조적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인간이 고슴도치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라는 것을 무시할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인본주의는 흔히 인간의 특권적 지위를 옹호하는 사상으로 비판받지만 오히려 그 같은 인간의 특권적 지위에 동반된 책임을 강조하는 겸허한 태도일 수 있다. 그러나 신유물론과 포스트구조주의는 인본주의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질 들뢰즈는 인간 주체를 주춧돌로 삼는 철학 전통에서 훌쩍 벗어나 웅장한 형이상학적 유물론을 추구하지만 이글턴이 보기에는 기본적으로 ‘유물론자’조차도 아니다. 왜냐하면 들뢰즈가 말하는 “생명”은 인간의 “몸”이 발휘하는 완강한 저항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멋진 그림 앞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을 듯한데, 이글턴은 어떤 불만을 느끼는 것일까? 왜 그는 ‘신체적 유물론’이라는 대안을 들이대면서 이런 탈인간적 형이상학에 저항하는 것일까? 철학 공부 따위는 해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쉽게 알아먹을 만한 다음 인용문에 그 답이 있다. “역사적 유물론과 달리 신유물론의 모든 유파들은 착취적 세계에서 사람들이 처한 운명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하다.” 다들 알겠지만 ‘역사적 유물론’은 사회경제적 변화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이다. 1990년대 이후 숱한 사람들이 마르크스 철학의 실패를 이야기하고 더 일반적으로 근대철학의 종언을 이야기했지만, 21세기가 시작되고도 한참 지난 지금, 테리 이글턴은 본래 마르크스가 품었던 화두를 되새기는 셈이다. “착취적 세계에서 사람들이 처한 운명”이라는 화두를 말이다. 이것이 터무니없는 시대착오인지, 아니면 거센 유행의 물결에 가렸던 진짜 문제 혹은 진실의 재등장인지는 독자 스스로 판단할 문제일 것이다. 분열적, 개방적, 창조적, 자기초월적인 몸 결국 관건은 인간상이다. 우리는 어떤 놈인가? 라는 질문의 대답, 우리가 스스로 그리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 말이다. 관념론이든, 신유물론이든, 신체적 유물론이든, 거기에 담긴 메시지의 핵심은 ‘우리는 이러이러한 존재다’라는 대답으로 요약될 것이다. 그리고 저자 테리 이글턴의 신체적 유물론이 들려주는 메시지는 ‘우리는 분열적인 존재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분열성을 “시간성”, “창조성”, “개방성”, “초월성” 등과 연결한다. 우리의 분열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글턴은 전통적인 영혼-신체 이원론자로 전락할 성싶기도 한데, 그는 우리의 분열성을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그 이원론을 함축하지는 않음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원론자들의 오류는 인간을 자기 분열적 존재로 보는 것에 있지 않다. 그들의 오류는 단지 이 균열의 본성을 잘못 파악하는 것에 있다. …… 우리가 우리 자신과 불화하는 것은 몸과 영혼이 서로 불화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적이고 창조적이며 개방된 동물이기 때문이다.” 테리 이글턴에게 관념론이나 신유물론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끝내 낯선 자’라는 사실을 일깨우지 않는 사상, 그래서 비판할 수밖에 없는 사상이다. “자기를 뛰어넘기는 인간 몸의 내재적 속성이다”라는 말에서 보듯이, 이글턴이 보기에 우리 인간은 무언가로 고정되기를 한사코 거부하면서 울타리를 뛰어넘는 존재이다. 신체적 유물론 이 책 《유물론》의 핵심은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저자 이글턴이 내놓는 “신체적 유물론”이라는 대답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