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300만 베스트셀러 실록사가 박영규가 완성한 국내 최초 ‘조선 관청 사전’
지금껏 다루지 않은 조선의 국가 경영 시스템을 한눈에 읽는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직종은 공무원이다. 2018년 3월 현재 공무원 시험 준비생은 44만 명에 달하고, 같은 해 6월에 실시한 서울시 9급 보건직 공무원 채용 경쟁률은 135대 1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 시대 공무원의 인기가 지금보다 높았다. “예컨대 1796년(정조 20년) 이황의 학덕을 기리고자 실시한 도산별과 과거에 7천 명이 넘는 인원이 응시했는데, 급제자는 단 2명에 불과했던 것이다.”(15~16쪽) 도대체 무슨 특전이 주어졌기에 관리의 인기가 이토록 높았을까? 왕조 국가 조선에서 관청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으며, 관리들은 관청에서 무슨 일을 했던 것일까?
300만 베스트셀러 ‘한 권으로 읽는 역사’ 시리즈를 집필한 역사 저술가 박영규는 신간 《조선관청기행》에서 500년 왕조의 국가 경영 시스템을 낱낱이 살핀다. “국가를 사람의 몸에 비유한다면 관청은 인체를 지탱하는 골격에 해당합니다. 조선이라는 국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선의 행정 조직, 즉 관청을 알아야 합니다.”(4쪽) 이 책은 왕조 국가 조선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조선의 행정 조직과 관직 체계를 국내 최초로 일괄한 ‘조선 관청 사전’이다.
정무를 관장한 일곱 재상의 최고 관청 의정부, 출세의 요직인 왕의 공식 비서실 승정원, 인사권을 쥐어 ‘하늘이 내린 관직’[天官]이라 불린 이조, 국가의 학문을 책임진 홍문관, 궁궐의 여성 공무원 전담 관청 내명부까지, 조선 왕조의 골격을 행정부터 입법?사법까지 명쾌하게 정리하여 조선의 권력 지도를 한 권으로 완결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을 두고 펼쳐진 조선 문무 엘리트의 열망이 책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선은 어떻게 왕조 500년을 운영하고 통치했을까
조선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수준 높은 역사 안내서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과 왕조 국가 조선은 정치의 기본 원리는 다르지만, 큰 줄기는 같다. 권력을 정당화하여 영토와 인구를 통치하는 ‘국가’라는 점이다. 국가는 추상적인 힘인 권력을 제도로 구체화하는데, 국가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바로 행정 조직이다.
행정 조직은 관공서, 곧 관청이다. 우리가 관청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조선 500년 역사를 꿰뚫는 근간이기 때문이다. 문무 관리와 이들을 보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조선을 지탱하고 운영하고 통치해왔다. 이 책에는 실록사가로서 저자의 치밀한 분석과 고증, 역사 대중화의 기수로서 통찰력 있는 해석과 풍부한 사료가 담겨 있다.
관청이 어떤 방식으로 설계되고 관리들이 어떻게 일했는지 살펴보면, 조선을 500년 동안 이끈 국가 경영 시스템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조선관청기행》은 조선의 행정 조직과 관직 체계를 속속들이 밝혀 조선의 숨겨진 실상을 생생히 그려낸다. 이 책이 관청을 다룬 역사책 한 권 없이 조선의 실체를 이해하려고 애쓰며 불편을 겪은 역사 독자들에게 최초의 수준 높은 안내서가 되어줄 것이다.
왕조를 위해 일한 조선의 공무원들, 그들은 누구였을까?
어디서 일하고 어떻게 일했을까?
조선의 양반에게 재상보다 더 영예로운 관직이 있었다!
홍문관 대제학은 나라의 학문을 책임진 수장으로, 왕의 글을 짓는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했다. 그런 까닭에 홍문관 대제학을 ‘온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이라는 뜻의 문형(文衡)이라고 불렀다. 홍문관의 첫째 자리는 영사(領事)로 영의정이 겸직했다.
문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조선의 양반에게 큰 영예였다. 심지어 삼정승이 되는 것보다 문형이 되는 것을 더 영예롭게 여겼다. 왜냐하면 문형이 정승이 되는 경우는 있어도 정승이 나중에 문형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승을 임명할 때는 따로 심사를 거치지 않았으나 문형은 권점(圈點)이라는 별도의 심사를 세 차례나 거쳤다.
급여 없는 관직 무록관(無祿官) 관리들은 어떻게 수입을 챙겼을까?
조선의 관직은 실직(實職)과 산직(散職)으로 나뉘는데, 실직은 실제로 업무를 맡는 관직이고 산직은 업무를 맡지 않는 명예직이다. 그런데 실직이라고 해서 모두 녹봉을 주는 것이 아니라, 녹봉이 있는 녹관(祿官)과 녹봉이 없는 무록관으로 구분했다. 심지어 무록관의 비중이 적지 않았다.(23쪽) 급여가 없는데도 왜 관직을 받고 일했던 것일까? 첫째로 관직을 갖는 일 자체가 양반 신분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거나 음서에 해당되지 않은 양반이 주로 무록관을 맡았다. 둘째로 급여가 없다고 해서 수입이 없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관리의 신분을 이용해 재주껏 뒷거래로 수입을 챙겼다. 평민, 관노비, 다른 관청의 관리 등 업무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돈을 받았다. 조선 조정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묵인했다.
‘언론삼사’ 사간원, 홍문관, 사헌부는 어떻게 역할을 분담하고 왕을 견제했을까?
조선에서는 행정 조직의 중앙 관청이 오늘날의 언론, 즉 국가 운영과 정치의 잘못을 논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삼사 중에서 사헌부와 사간원을 대간(臺諫) 혹은 언론양사라 불렀고, 왕의 자문 기관이자 학술 기관의 기능을 겸한 홍문관을 별도로 취급했다. 왕과 사헌부 및 사간원이 대립할 때 홍문관이 갈등을 중재하며 해결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기 때문이다. 사헌부는 조정의 모든 관리를 감독하고 입법과 사법에도 관여했고, 사간원은 간쟁, 즉 왕의 잘못을 지적하고 주요 신하들을 규탄하는 일을 전담했다.
조선의 문무 관리에게 가장 인기 있는 관청은 어디였을까?
왕을 직접 대하는 언론삼사의 관직이 문관의 출세에서 핵심 요직이었다. 특히 의정부의 일곱 재상이나 육조의 판서가 되려면 홍문관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조정의 실세 이조에서 인사에 관한 실무를 담당하는 관직이 ‘이조전랑’인데, 홍문관 출신의 청년 문관 중에서 이조전랑을 발탁했다. 유학을 숭상하고 문관을 우대한 조선에서 어쩌면 자연스러운 관행이었다. 왕의 공식 비서실 승정원 소속 여섯 승지는 격무에 시달리느라 관직을 오래 맡을 수 없었지만, 그만두었을 때 무조건 종2품 이상의 벼슬을 보장받았다.
무관에게는 선전관청이 가장 유망한 관청이었다. 선전관은 왕명을 직접 전하고 왕을 호위하는 무관으로, 무반의 승지로 불리기도 했다. 무예와 명법을 끊임없이 연마해야 했고, 승진에 특혜가 있는 것은 물론 무관 중에서 귄위 있는 존재로 대우받아 무반 관직 중에서 지원자가 가장 많았다.
조선의 여성 공무원들은 무슨 일을 했을까?
벼슬을 받은 여성을 명부(命婦)라 하는데 궁궐 안에 있는 여성을 내명부, 궁궐 밖에 있는 여성을 외명부라고 불렀다. 외명부는 왕족의 여성과 고관의 아내 들로, 명예직이었다. 그 밖에 벼슬을 받고 관청에서 일한 여성으로 의녀가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의 일만 아니라 포도청의 수사를 돕는 여자 경찰, 연산군 때 이후로 사대부의 잔치에 불려가 기생으로도 일했다. 그래서 의녀들이 이때부터 약방기생이라고도 불렸다.
내명부는 후궁과 궁녀로 나뉘고 이들을 지휘하는 사람이 왕비였다. 궁녀는 궁중여관(宮中女官)의 별칭으로 궁궐의 잡무를 도맡았는데, 법에 따르면 천민을 뽑도록 했지만 실제로는 평민이나 중인의 딸을 궁녀로 뽑았다. 궁녀는 궁궐에 들어와 15년을 일해야 품계를 받고 나인이 되었고, 다시 15년을 일해야 상궁이 되었다. 왕과 왕비의 생활을 보호하고 보살핀 지밀, 옷을 만드는 침방, 세숫물과 목욕물을 담당하는 세수간, 차와 과자를 준비하는 생과방, 음식을 담당한 소주방, 빨래를 도맡은 세답방 등이 궁녀가 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