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는 애당초 잘못 설계되었으며 본질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다
20세기를 지배한 세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자유주의뿐이다. 500여 년 전 구상된 자유주의는 근대 이후 서구의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 잡았고, 이후 점차 전 세계로 그 영향력을 뻗어나갔다. 오늘날 자유주의는 명실공히 정치뿐 아니라 경제, 문화, 교육까지 관장하는 국제 질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사람들은 자유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잊곤 한다. 자유주의 옹호자들은 자유주의가 정치적 진화의 종착지이며, 자유주의 안에서 발생하는 병폐들은 자유주의 질서 내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늘날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도널드 트럼프의 미 대통령 당선과 같은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자, 위기의 원인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서구 정치 체제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자유주의에서 그 원인을 찾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정당정치, 공동체 해체에 따른 시민 간 분열, 포퓰리즘과 권위주의의 부상, 경제 양극화와 같은 문제들이 체제 때문에 발생하고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의 저자 패트릭 J. 드닌 노터데임대학 정치학 교수는 이러한 목소리를 내는 학자 중 한 명이다. 자유주의 연구의 권위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자유주의는 애당초 잘못 설계되었으며 본질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는 전 세계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토대로 삼고 있는 일군의 원칙, 즉 자유주의의 근본적인 개념에서부터 시작하여 자유주의에 구조적 모순이 내재되어 있음을 차근차근 논증한다.
자유주의는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자유주의 체제에서 개인주의와 국가주의는 어떻게 나란히 전진하는가
이 책의 제목(원제 ‘Why Liberalism Failed’)은 현재형이 아닌 과거형 동사가 쓰였다. 족히 500년간 존속해왔고, 20세기 이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된 자유주의가 ‘이미’ 실패했다는 저자의 주장은 일견 아이러니하게 들린다.
이 의문에 저자는 더욱 의아한 답을 내놓는다. 바로 자유주의는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스스로 정한 계획과 목표를 달성했다는 점에서 성공했으나 그것은 자유주의의 소멸을 예비하는 ‘패배나 다름없는 승리’, 장차 자유주의를 허물어뜨릴 병폐들을 낳은 성공이었다. 오늘날 나타나는 병폐들은 자유주의의 얼개 안에서 정책이나 기술적 해법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고, 자유주의 자체의 내적 모순에서 기인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단순히 프로그램의 버그가 아니라 애당초 잘못 설계된 운영체제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 셈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에 내재된 본질적인 모순이란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두 가지 상반된 자유관, 즉 고대적 자유관과 근대 자유관을 이해해야 한다. 고대 세계에서 우세했던 자유의 의미는 자신의 욕구와 자신이 속한 정치체를 스스로 다스리는 학습된 역량이었다. 달리 말해 자유란 절제, 지혜, 중용, 정의 같은 덕목들을 몸에 익힘으로써 개인 수준과 정치체 수준에서 자치를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이었다. 고대적 세계관에서 인간이란 본성적으로 관계 맺는 동물, 사회적 · 정치적 동물이었으므로 정치체와 분리된 개인의 자유, 정치 이전의 자유는 성립할 수 없었다.
근대 자유주의의 창시자들은 이 오래된 자유관을 뚜렷이 거부하고 자유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려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애초에 자연상태에 있었던 개인들이 사회계약을 맺어 정치사회를 이루었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자연상태에서 개인들은 선천적으로 자유로운 존재, 저마다 따로 떨어져 관계를 맺지 않는 자율적인 존재였다고 전제했다. 이렇게 자연상태를 떠올림으로써 자유주의 창시자들은 고대적 자유의 의미를 뒤집었다. 이제 자유는 함양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 되었다. 정치체와 불가분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 되었다. 자기 규율의 상태가 아니라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선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상태가 되었다.
자유주의는 이 새로운 자유 개념을 받아들여 ‘개인의 자율성 확대’를 당위이자 목표로 설정했다. 고전적 자유주의자와 진보적 자유주의자 모두 이 목표를 공유한다. 다만 목표를 달성하는 최선의 방법을 두고 논쟁할 뿐이다. 전자는 국가의 개입을 줄이고 시장의 힘으로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후자는 시장보다 공정한 국가의 프로그램으로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율성을 확대하려면 규범, 관행, 문화, 전통, 공동체 등 개인이 직접 선택하지 않은 사회의 제약으로부터, 그리고 자연의 제약으로부터 개인을 해방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의 개인은 특정한 시공간과 관계 안에서 태어나고 또 살아간다. 그러므로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성의 영역을 최대한 넓게 보호하려면 국가의 역할을 확대할 수밖에 없다. 국가만이 “가족부터 교회까지, 학교부터 마을과 공동체까지, 비공식적이고 익숙한 기대와 규범으로 행동을 통제하는 모든 형태의 결사와 관계로부터” 개인을 해방할 정당한 권리를 보유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자유주의 체제에서 개인주의와 국가주의가 나란히 전진한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안에서 “국가는 개인주의의 주된 동력이 되어가고, 개인주의는 국가의 권력과 권한을 확대하는 주된 원천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드닌 교수는 토마스 홉스, 존 로크와 같은 초기 자유주의자들의 이론부터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론까지 폭넓게 살펴보며, 자유주의에 내재한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찬찬히 논증한다. 나아가 정치, 경제,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이러한 모순이 어떻게 발현되고 심화되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다각도로 조명하며, 자유주의가 어떻게 개인의 진정한 자유를 박탈하고 국가의 권력을 무제한으로 확장시키는지, 그 결과 인간을 얼마나 소외시키고 무력화하는지 입증한다.
자유주의에 대한 지배적 담론을 교란하여 새로운 사유를 자극한다
이 책은 자유주의를 정치 및 경제 체제라는 좁은 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인간의 삶과 세계 전체를 변형시키는 보다 넓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룬다. 그리하여 오늘날 학계와 정계, 대중 담론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자유주의에 대한 불만의 여러 갈래들을 한데 모으고, 자유주의 비판의 근본 전제를 제시한다.
자유주의는 스스로에게 충실할수록, 스스로를 완성해나가고 그 내적논리를 더욱 분명히 할수록, 즉 성공할수록 실패한다는 저자의 급진적이고 과감한 주장에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민주주의와 더불어 자유주의가 위기를 맞았다는 데에는 수긍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미 실패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의의는 너무나 익숙해져 압도적으로 느껴지는 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지배적인 담론을 교란하고, 그 담론의 판에 박힌 이해와 비판 회피에 도전함으로써, 자유주의를 더욱 근본적으로 사유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데에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를 높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자유주의에 대한 의심의 목소리가 높아져가는 이 시점에, 자유주의의 위기 신호를 미리 인식하고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