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요식업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미쉐린 가이드 스타 ‘진진’
2016년 말, 요식업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미식가의 성서’라고 불리는 미쉐린 가이드가 한국에도 론칭한다는 소식이 퍼졌다. 특급호텔 레스토랑, 고급 요릿집 등이 수록을 기대하며 발표만 기다리고 있었다. 총 24곳이 발표됐는데 눈에 띄는 가게와 셰프가 있었다. ‘진진’ 그리고 왕육성. 진진은 마포구 서교동 골목에 자리 잡은 작은 중식당이다. 게다가 개업한 지 2년도 안 된 신생 가게나 다름없었다.
‘니가 거기서 왜 나와?’
다들 의아해 했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 편》에서 별을 받은 중식당은 단 두 곳이었다. 한 곳은 포시즌스 호텔에 위치한 유유안이고, 다른 한 곳이 바로 진진이었다. 미쉐린 가이드는 “합리적인 가격에 다양하고 수준 높은 중식을 제공하는 중식 전문점”이라 평했다. 사실 진진을 알고, 왕육성을 아는 사람들에겐 ‘역시’ 싶은 결과였다.
『진진, 왕육성입니다』는 바로 이 깜짝 스타 진진과 진진을 만든 왕육성에 대한 이야기다. TV에 얼굴을 자주 내비치진 않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는 사실 이미 중화요리계 스타다. 왕육성은 50년 업력을 가진 백전노장이자, 대관원, 홍보석, 플라자호텔 도원 등 장안에서 이름난 중식당을 거쳐 코리아나호텔 대상해 오너 셰프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다.
‘왕육성이 망했다고?’
그런 그가 어느 날 호텔 일을 접고 동네에 작은 가게를 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했다. 후배 요리사는 식당에 다녀갔다가 울었다고 했다. 다들 왕육성이 망했다고 수근거렸다. 그런데 망한 줄 알았던 노장의 가게가 업계 내 파란을 일으킨 것이다.
“엉? 실패한 적이 없어? 왕육성 셰프의 삶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10대에 철가방을 든 뒤 거침없이 달려왔으니 그럴 만하다. 진진 요리를 맛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진진의 성공 뒤에는 『삼국지』 뺨치는 전략과 전술이 촘촘하게 숨어 있다. 낙관과 긍정은 난관을 돌파하는 힘이다.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말은 ‘요리하는 현자’ 왕육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박정배(음식 칼럼니스트)
사실 진진은 왕육성이 50년 요리 인생에서 축적된 내공을 모두 쏟아부은 ‘작품’이나 다름없다. 모든 것을 그는 철저하게 설계했다. 가게 위치부터 메뉴 선정, 주류 판매 목록까지 허투루 정해놓은 것이 단 한 가지도 없다. 유동인구 거의 없는 골목 자리에서, 짜장면‧짬뽕도 없고 탕수육도 없고 단무지까지 없는 이 이상한 중국집, 결국에는 성공했다. 역시 그는 이번에도 실패하지 않았다. 한 기자가 말했다. ‘전승의 승부사 왕육성.’
짬뽕 없어요, 짜장면도 없어요. 거꾸로 가는 중국집
왕육성이 진진을 준비하며 내건 모토는 ‘동네서 즐기는 호텔 요리’였다. 가게를 찾는 손님들이 호텔 못지 않은 수준의 요리를 부담 없는 가격으로 즐기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가게를 여는 사람들은 누구나 억 소리 나는 권리금을 주더라도 호화 상권에서 화려하게 매장을 꾸며 손님을 모시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는 권리금이 없고 시설 투자에 돈을 적게 들일 40~50평 내외의 작은 곳을 찾았다. 그 돈을 아껴 가격을 낮추고, 재료비에 투자하는 게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SNS에 점심에도 문 여는 신관을 내겠다는 이야기를 올린 적이 있어요. 성급했어요. 주변 가게들 사정을 알아보지 않고 섣불리 꺼낸 말이거든요. 그 때문인지 가까이 있는 식당 주인이 편지를 보내왔어요. 장사가 안돼서 걱정인데 진진이 자기네 가게를 인수하면 어떻겠냐는 내용이었어요. … 이런 동네에서 진진이 점심에도 장사를 하면 될까 싶더군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손님을 진진이 빼앗을 수 있잖아요.”
메뉴판에서 짜장면과 짬뽕, 탕수육을 없애는 파격을 시도했다. 점심 장사도 하지 않았다. 여느 중국집과 다름없이 식사 메뉴를 내고 낮부터 손님을 받는다면 가뜩이나 좁은 골목 상권에서 작은 파이를 가지고 다투는 꼴밖에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미 서비스 요리로 인식돼 버린 만두도 직접,정성스레 만들어 제 가격에 팔았다. 게다가 주문이 잘 들어오지 않는 채소요리와 재료 관리가 까다로운 생선요리를 메뉴에 넣었다. 남들이 보기에 거꾸로 가는 이상한 중국집은 사실 다 그의 계획이자 도전이었다. 글 쓰는 셰프 박찬일의 말을 빌리면 ‘남이 안 하는 것을 하고, 나른한 고정관념을 깨고, 손님들이 상상하는 것을 넘어서려고 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화교 2세의 숙명, 왕육성을 중국집으로 이끌다
다소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왕육성도 무턱대고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요리 인생 50년에서 우러나온 노하우와 지혜를 바탕으로 한 시도였다. 왕육성은 열일곱 살 때 학교를 관두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이 대륙에서 온 화교였는데 집이 갈수록 어려워지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러나 화교 2세로서 왕육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1960년대만 해도 화교는 토지 소유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한국 사람 명의를 빌려야 했다. 토지를 빼앗기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영주권이 없던 시절 화교는 외국인출입국관리법 적용 대상이었다. 주기적으로 체류 기간 연장 허가를 받아야 했다. 공무원도 할 수 없었고, 변호사나 의사 등 국가가 인정하는 자격증도 딸 수 없었다. 비자 문제가 까다로우니 일반 회사도 화교 채용을 꺼렸다.
왕육성은 자연스레 화교들이 많이 자리 잡은 중국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칼을 잡은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식칼·가위·면도 셋을 삼파도(三把刀)라고 해요. 모두 날이 달린 칼이죠. 이를 이용해서 하는 일을 삼도업(三刀業)이라 하고요. 요리점·포목점·이발소가 대표적이에요. 기술만 익히면 먹고살 수 있는 직종이니까요. 학교 문을 나섰을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뻔했어요. 칼과 웍은 어쩌면 필연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위동 대성원에서 배달로 시작해 뚝섬 성수원에서 홀 근무를 거쳐 홍보석에 가서야 주방에 입성했다. 칼을 쥐게 됨에 감사하며 매일 오전 제일 먼저 출근해 칼을 갈고 주방 일을 준비했다. 퇴근하며 자취방에서 그날 보고 익힌 요리를 그림으로 그리며 복기했다. 그런 성실함과 실력을 인정받아 만다린과 해당화를 거쳐 플라자호텔 도원, 코리아나호텔 대상해까지 갔고 마침내 주방장이 될 수 있었다.
훗날 진진을 만들 때 그는 나루 진津을 이어붙여 썼다. 아버지의 고향인 중국 톈진과 지금 왕육성이 사는 마포구 양화진에 함께 들어 있는 한자를 상호로 만들며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담으려 했던 것이다. 화교로서 공부를 포기하고 칼을 들어야만 했던 자신의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그는 운명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왕육성의 힘
대상해 주방장으로서 10년을 지낼 무렵, 호텔로부터 매장을 인수받았다. 오너 셰프로 막 첫걸음을 딛는데 IMF가 터졌다. 위기를 맞은 왕육성은 이 상황을 기회로 만들자고 생각했다. 현재 경제 상황에 걸맞은 비즈니스 코스를 만들었다. 또한 식재료비를 어음으로 끊어주던 관행을 없애고 현금으로 지불하니 쪼들리던 거래처들이 반색하며 더 좋은 식자재를 공급하고 납품가를 깎아주었다. 덕분에 손님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질 좋은 요리를 손보일 수 있었다. 대상해는 IMF 위기 상황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2004년에는 주5일근무 시대가 열렸다. 광화문 근처의 직장인이 주요 고객층이어서 타격이 컸다. 다시 마주친 위기 앞에서 왕육성은 주말 스페셜 메뉴라는 대비책을 내놓았다. 휴일에도 손님들을 받았다. 그러자 매출은 회복되는데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졌다. 대충 일해도 그만이던 주말에 바빠진 직원들이 알아서 예약 전화를 줄여 받았다. 왕육성은 또 승부수를 던졌다. 월급을 없애고 매출액과 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