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사회라는 수용소,
우리 안의 수용소에 관한 인류학 보고서
식민지 시대에서 코로나 팬데믹까지,
포로수용소에서 공중화장실까지,
한센인에서 이주노동자까지
수용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전체주의-독재국가의 잔재다. 나치독일의 다하우와 아우슈비츠, 소련의 굴라크, 동아시아 전역에서 악명을 떨친 일본제국의 강제수용소, 한반도 남북의 요덕관리소와 삼청교육대…. 그곳을 향하는 동원열차 속 각국의 불령선인들.
하지만 눈을 조금만 크게 뜨면 엇비슷한 풍경을 2020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각종 감호시설, 폐쇄병동, 외국인보호소, 한센인 마을, 장애인 시설과 노숙인 쉼터. 대개 ‘질서’를 명분으로, 때로는 ‘보호’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오늘의 수용소들이다. 여기에 수년간의 팬데믹을 통해 수천만 시민이 공유한 ‘자가격리’ 경험은 모두에게 수용과 격리가 언제든 닥칠 수 있는 현실임을 일깨웠다. 요컨대 수용소는 어디에나 있고, 우리 모두는 언제든 난민이 될 수 있다.
《수용, 격리, 박탈》은 질서나 보호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사회라는 거대한 수용소’ ‘우리 안의 수용소’에 대한 인류학적 탐구다. 한국·일본·타이완 등지에서 저마다 이 문제를 고민해온 연구자·활동가 17인은 동아시아 각지의 포로수용소에서 한센인 마을까지, 식민지 시대에서 코로나 팬데믹에 이르는 100년의 시공간을 아우르며 세계의 내부로 추방당한 존재들의 진술에 주목한다. 전쟁과 재해에 휘말려, 장애와 질병을 지녔다는 죄목으로, 국적이나 신분을 이유로 수용되고 격리되고 끝끝내 존엄을 박탈당한 이들의 삶은 동아시아 100년사의 가장 어둡고 긴 그림자다. 따라서 그들의 목소리를 채집해 복원하고 탐문하는 작업은 ‘최악의 일은 지나갔다’고 장담할 수 없는 우리의 현재를 수렁에서 한 걸음 밀어내는 동력이자, 적의와 불신으로 바람 잘 날 없는 동아시아 시민사회를 공동체로 연결해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책은 5부 15개 장으로 구성된다. 1부 〈‘사회’라는 수용소: 재해, 귀환, 피난〉은 창살과 장벽으로 둘러싸인 특정 공간이 아닌 사회구조 전체가 수용소라는 관점에서 식민지배, 전쟁, 공해 등에 떠밀려 난민화된 삶을 조망한다. 2부 〈수용소와 피난소의 경계: 질병, 젠더, 자활〉에서는 한센병이나 자국 송환 등의 사유로 격리·배제된 생활을 강요받은 이들에게 수용과 피난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아이러니에 주목한다. 3부 〈수용소와 인종화된 식민주의: 트라우마, 병역거부, 아카이브〉에서는 제국-식민주의(태평양전쟁)가 냉전-국민국가(한국전쟁)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수용소 내부의 수용소’ ‘수용소 이후의 수용소’ 현상을 들여다본다. 4부 〈수용소, 식민에서 냉전으로: 포로감시원〉은 3부의 연장선상에서 식민 지배 및 전후 사회주의에 대한 억압에 초점을 맞춘다. 5부 〈수용소의 현재: 입관수용소, 외국인보호소, 공중화장실〉에서는 법과 보호의 논리로 폭력이 자행되는 오늘날 수용시설의 문제를 살핀다.
세계의 내부로 추방된 존재들에 대한
문학의 질문, 사회적 모색, 역사적 연결
(여는 글에서)
2023년 8월, 대구의 한 공단 통근버스를 출입국사무소 차량이 막아섰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기습 단속이었다. 10대 후반부터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일해왔고, 동고동락한 친구들이 구금·추방될 것이 안타까웠던 버스 운전자 김우주(40대, 가명)는 단속을 피해 운행을 계속했고, 버스 문을 열어 동료들이 도망가도록 도왔다. 그 과정에서 단속 공무원 열한 명이 부상을 입었고, 서른여섯 명의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붙잡혔으며, 김우주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혐의로 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아 수감 중이다. 자신이 단속 대상도 아니고, 큰 손해와 책임이 따를 것이며, 성공할 가능성조차 희박한데도 김우주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수없이 반복됐을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저랑 다를 바 없는 사람이잖아요. 같이 생활하던 사람이잖아요. 그때는 정말 머리가 새하얗게 돼서, 차가 주변에 있다고 생각도 못 했고, 버스에서 살려달라고, 도망가라고 외치는 그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 타 지역에 혼자 있는 저는 외국인 근로자가 남 같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여기 오기 위해 브로커한테 얼마를 주는지, 3년은 일해야 빚이라도 갚는다는 걸 알아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무시할 수 없었나 봅니다.
‘한 공간’에서 함께 생활한 그들이 ‘남 같지 않다’는 김우주의 말은 손쉬운 동정도, 안전한 자리에서 느끼는 공감도 아니다. 오히려 고되고 외로운 ‘그들’과 닮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로 번지기 쉬운 순간에, 그는 ‘그들’의 도망을 돕고 ‘고용허가제’의 부정의를 짚어낸다. 김우주와 미등록 이주노동자 사이에는 국적이라는 선명한 차이가 있지만, 김우주가 그들과 함께 행동한 순간 그 또한 구금되거나 공동체에서 추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단속된 이들을 수용하는 ‘외국인보호소’는 이 자의적 경계를 합법적인 양 보이게 하고, 구금과 추방의 폭력을 묵인하는 장치다.
국적·제도·수용소의 경계를 넘어선 김우주의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과 행동은 이 책이 도달하고자 하는 관계를 표현한다. 하나의 책이 세상에 던지는 하나의 질문이라면, 그럼으로써 꿈꾸는 세계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라면, 《수용, 격리, 박탈》은 김우주의 행동이나 마음과 같은 방향을 향해 있다.
저자 소개
-지은이
김보람
사학자. 일본 근현대사 속에서 마이너리티 민중의 생활과 이동 및 식민주의 경험을 연구하고 있다. 박사과정을 준비 중이다.
쉬징야(許景雅)
문학자.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일제강점기 말에서 해방 초기 한국과 타이완의 문학과 문화 생산, 특히 구식민지 인구의 이동과 역사 기억에 공부의 초점을 두고 있다.
김예림
문학자.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한국현대문학을 전공했다. (포스트)콜로니얼리티, 냉전문화, 트랜스내셔널리즘 등의 틀에서 한국 근현대 문학·문화 연구를 진행했으며, 노동과 이동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호시나 히로노부(星名宏修)
문학자. 히토쓰바시대학대학원 언어사회연구과 교수. 일제강점기 타이완 문학 연구, 특히 식민지 타이완에서 살아간 ‘무명’의 일본인(内地人)이 무엇을 표현하고 무엇을 표현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식민지의 한센병 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조경희
사회학자.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부교수. 식민주의, 이주, 젠더, 소수자 문제 등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김아람
사학자. 한림대학교 인문콘텐츠융합‧사학 전공 조교수. 한국 현대사에서 이주와 정착‧수용에 대한 관심을 줄기로 해방과 한국전쟁, 산업화 과정에서 있었던 강제이주민을 ‘난민’으로 보고 이들의 정착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탐구하고 있다.
권혁태
사학자. 성공회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경제사와 일본현대사를 전공했다. 야마구치대학 교수로 일했고, 계간 《황해문화》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김한상
사회학자.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부교수. 냉전기에 구축된 시청각 아카이브의 지식 체계와 아카이브 영화 읽기의 방법론을 연구하고 있다. 별개로 한국 사회의 인종주의와 인종 정치를 사회학적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며, 이 책에 실린 글은 그런 관찰과 궁리의 소산이다.
란스치(藍適齊)
사학자. 타이완국립정치대학교 역사학과 부교수. 미국 시카고대학교 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 영역은 타이완사, 근현대 동아시아사, 민족주의·식민주의·제국주의, 역사와 기억(특히 전쟁 기억)이다.
중수민(鍾淑敏)
사학자. 타이완 중앙연구원, 타이완사연구소 연구원. 주요 관심사는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