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근대 사회가 헤겔 철학에 고한 섣부른 종언에 대한 성찰 헤겔 철학으로 다시 보는 현대의 소외와 왜곡의 문제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났던 사상적 양상은 ‘전체주의’ 혹은 ‘민족주의’에 기인한 파시즘이다. 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은 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나서야 낙관적이기만 했던, 그리고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유럽의 형이상학에 대하여 비로소 회의하거나 비판하기 시작했다. 많은 학자가 이러한 전체주의의 사장적 배경으로 헤겔의 철학을 꼽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헤겔의 철학적 특성은 변증법적 지양의 단계를 거쳐 조금 더 상위의 단계로의 고양을 전제하는데, 그 고양은 즉 진보를 염두에 두어 해석할 만하다. 역사의 낙관론을 제시할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국가를 위해 개인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봄으로써 전체주의를 옹호했던 대표적인 파시스트라고 해석할 여지가 다분하다. 이러한 해석은 헤겔 철학에 대한 하나의 관념을 형성했고, 헤겔 철학에 대한 거부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전후 유럽 사회가 헤겔의 철학은 저버렸을지언정 전체주의의 어두운 뿌리는 거두어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찰스 테일러의 분석에 의하면 산업 사회로 대변되는 근대 문명은 계몽주의적 인간관을 확장시킨다. 다시 말해서, 과학에 토대한 합리성을 추구하고자 한다. 따라서 효용성과 생산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게 된다. 효용성과 생산성은 필연적으로 조직 구성원의 잡음이 없어야 하며 동질화를 전제로 한 참여가 수반된다. 여기서 근대 사회의 문제가 발생한다. 더 큰 집단에 대한 소수 집단의 동질화는 소수 집단의 자율성과 일체성을 상실한다는 희생을 거치지만 그렇다고 소수 집단과 다수 집단의 차이가 온전히 해결되지는 않는다. 가령 인디언에 대한 미국 사회의 동질화가 미국 내에서의 인디언 차별 문제를 저절로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테일러에 따르면 헤겔의 철학에 대한 오해는 헤겔의 종합이 파시즘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같이 힘에 의한 통합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헤겔의 국가관은 소수 집단들의 공동체성을 유의미한 것으로 보고 그들의 유의미한 분석을 용인한다. 따라서 헤겔의 통합은 급진적인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화해에 의한 것이다. 이것이 헤겔이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유산을 종합한 헤겔의 독자적인 유산이라고 말한다. 이는 근대적 합리성을 토대로 강제된 사회인 ‘무리’와는 다른 시민 사회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대적 민주 정체가 크게 필요로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유의미한 분화를 다시 회복하고, 그 결과로서 그 정체의 여러 부분적 공동체로 하여금 ─지역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직업적인 것이든 간에─ 사회 구성원들을 전체에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하면서 그 구성원들의 활동과 관심의 중요한 중심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본문 239쪽 인용 이러한 분석은 찰스 테일러가 얼마나 현실의 문제가 갖는 괴리들과 정치 문제에 현실적인 이해를 가지고 접근했는가를 잘 보여 주는 단적인 하나의 예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는 테일러가 말하는 정치철학에서의 헤겔 철학의 재고의 필요성에 대한 매우 간단한 요약에 불과하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근대 사회 안에서의 자유의 문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극복했다고 섣불리 판단한 헤겔 철학의 불가피한 왜곡, 칸트 이후로 분석철학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대륙철학에 대한 새로운 대륙철학의 전개 등 헤겔 철학을 새롭게 재고해야 할 많은 필요를 설파한다. 테일러가 이 책을 썼을 시절보다 더욱 분화되고 복잡 다양화되어 가는 오늘날 여러 전통은 더욱 파괴되어 가고, 조직 속의 개인은 더욱 원자화되며 소외되어 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원서의 2015년판 서문을 작성한 컬럼비아대학의 프레데릭 뉴하우저의 말처럼 이 책은 헤겔이 현대적 시의성을 갖는다고 생각했던 테일러의 근거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